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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결Lib May 08. 2017

드라마 <청춘시대>와 혐오없이 이 세상 살아가기

혐오없는 세상을 꿈꾸며

#청춘시대 #드라마읽기

 



좋은 드라마, 청춘시대 


오랜만에 좋은 드라마를 만났다. 바로 <청춘시대> 이야기다. 내게 있어 좋은 드라마란 보는 재미뿐 아니라 생각하는 재미도 주는 드라마다. 생각할 지점을 워낙 많이 던져 주었기에 정주행 한참 후에도 후기를 쓰지 못해 놓아주지 못하던 터였다. 다른 시청자의 반응을 찾아보다가, 이 드라마를 양두구육, 즉 겉은 번지르르하나 속은 변변찮다고 폄하하는 한 블로거의 글을 읽게 됐다. 나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의견에 흥미가 생겨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요지는 이렇다. <청춘시대>는 일부 젊은 여성들의 시각을 청춘 전반의 것으로 일반화하여 은연 중에 남성혐오를 유발하는 편협한 드라마라는 것이다. 남성들은 전부 여성을 괴롭히는 가해자로 묘사되고 여성들은 비현실적으로 이상적이게 묘사된다는 것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자신의 공간에 어떤 표현을 하든 자유지만 일반화가 불편하다는 이 블로거는 자신의 글에서 일반화의 오류를 거듭 범하며 언행불일치하고 있다. '남성들은 이 드라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남성들은 보면 볼수록 이 드라마가 불편해진다'라는 식이다(재밌게도 내가 이 드라마를 처음 접한 건 대한민국의 가장 남성적인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군 내무반 사이에서 열풍이 불면서 부터이다). 

미안하게도 대한민국의 남자이면서 이 시대의 청춘이기도 한 나는 이 드라마에 깊이 공감했고 힐링 받았다. <청춘시대>는 분명 남녀노소의 시대상을 그린 '응답하라' 시리즈만큼의 보편성을 갖춘 드라마는 아니다. 근래에 보기 힘든 넓은 거실을 공유하는 쉐어하우스를 배경으로 하고 한쪽 성별(여성)의 인물들만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여성들의 이야기를 주로 담았다고 해서 이 드라마의 제목으로 <여성시대>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남자 없이 살 때 행복한 여성들의 '남자혐오' 드라마가 아니라 미성숙하지만 함께 살아가기를 고민하는 청춘들의 '공생'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그렇게 느낀 이유를 설명해보려 한다. 

쉐어하우스 '벨 에포크(쫗은 시절)'에는 5명의 여대생들이 모여 산다. 알바를 하느라 24시간이 부족한 진명(한예리), 미래에 대한 희망을 잃고 '쉽게 살고자 하는' 이나(류화영), 본인의 약점을 숨기고 완벽한 연애를 꿈꾸는 예은(한승연), 무의식적으로 거짓말하는 지원(박은빈), 세상에 첫 발걸음을 뗀 은재(박혜수)까지. 나름의 결핍을 안고 사는 이들은 또래의 젊은이와 많이 닮아 있다. <청춘시대>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다섯 인물들의 사연을 소개한다. 


우리는 배려에 서툴다 


이들이 첫 번째로 전달하는 메시지는 '배려'이다. 벨 에포크에 가장 늦게 입주한 막내 은재는 쉐어하우스 적응에 어려움을 느낀다. 은재는 처음으로 하는 타지생활과 대학생활로 정신이 없지만 하우스메이스(이하 하메)들은 누구 하나 살갑게 그녀를 반겨주지 않고 오히려 번번히 실수를 지적하기만 한다. 참다 못한 은재는 하메들이 모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폭발한다. "그렇게 못 되게 굴 것까진 없잖아"라는 그녀의 외침은 미생의 '장그래'가 떠오를 정도로 서럽게 들렸다. 이에 깜짝 놀란 하메들은 황급히 은재에게 사과하지만 그녀들 역시 할 말은 있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몰라" 사실 하메들도 은재에게 나름의 방법으로 다가가기를 고민하고 배려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그 중에 잘된 것도 있었고 잘 안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은재가 그때그때 표현하지 않으니 어떤 기분인지 어떤 걸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파악할 수가 없었고 갈등이 발생했다.

하메들의 배려심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배려에 서툴 뿐이다. 내가 생활하는 내무반에도 공동생활에는 초짜인 6명의 청춘들이 함께 산다. 불편한 부분들이 있지만 서로 배려하기에 함께 생활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와 비슷한 상황이 종종 생긴다. 딴에는 배려하는 마음에서 표현을 아꼈던 것인데 소통이 안 되다보니 갈등의 골이 깊어져 큰 불화를 낳는다.

이 에피소드는 공동체 생활(사회 생활)에서 참고 견디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말해준다. 서로 표현함을 통해 이해의 폭을 늘려야 더 깊은 배려가 가능해진다.

'인내금지', '오지랖금지', '낭비금지' 벨 에포크의 이 세 가지 하우스 룰은 다소 극단적으로 보여도 우리의 서툰 소통을 보완해주는 좋은 장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청춘시대>는 진짜 남자만 미워하는가? 

 

이 드라마가 이뤄낸 하나의 성취는 오랫동안 중심서사가 되지 못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담아냈다는 것이다. 이건 앞서 지적한 '젊은 여성들의 시각을 청춘 전반의 것으로 둔갑'시킨다는 지적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부분이다. 한 집에 사는 젊은 여자 주인공 다섯의 삶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남자 등장인물들이 부수적 역할을 맡게 된 건 사실이다. 또 장르적 특성상 극적인 전개가 필요하다보니 대결구도가 만들어진 것도 맞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성애자들에게 차별받는 동성애자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성애에 대한 혐오 표출이 아니듯이 여성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해서 남자들을 배제시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 함께 사는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이해하는 건 곧 세상을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작가는 여성들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그렸다. 하지만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든 허구적인 내용을 담지도 않았고, 남자들이 없는 세상을 꿈꾸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작가의 주제의식이 '혐오'나 '증오'가 아니라 '소통'에 방점이 찍혀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고민에 깊이 밀착하되 그것을 억지로 치유하려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렇기에 이 드라마는 젊은 여성들뿐 아니라 그들의 오빠, 그들의 부모님들의 공감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사실은 너무나 어려운 평범한 연애 


많은 사람들이 평범한 연애를 꿈꾸지만 그걸 이루기 위해선 사실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다르게 살아왔고 다르게 살아가는 둘이 같은 길을 걷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은과 그녀의 남자친구 두영의 에피소드를 살펴보자. 두영은 나쁜 남자이다. 예은 몰래 하메 이나에게 작업을 걸다가 들통이 나고 예은에게 이별통보를 받는다. 그러나 두영은 납득하지 못하고 예은을 납치, 금하고 폭행하기까지 이른다. 최악의 경우이다. 정말 극단적인 경우이지만 현실에도 존재하는 문제이다. '조선대 의전원생 데이트 폭력사건'이 그러했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는 단순히 예은이가 똥차'인 남자친구를 만나서 고생한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연인 간의 소통방식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는 타인과의 관계와는 확연히 다르게 많은 것들이 허용된다. 하지만 연인 사이에도 엄연히 존중해야 하는 것들이 있고 마땅히 소통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예은은 남친이 자신이 멀리할 것을 두려워 평소에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늘 가면을 쓰듯 '척'을 해야 했고 남친이 맘에 안 드는 행동을 해도 스스로를 이해시키고 넘어갔다. 심지어는 두영이 일차적으로 폭력을 휘둘렀을 때에도 용서하고 넘어갔다. 본인의 진심을 관계에서 배제시켰고 사랑은 병들어갔다.

두영은 자신의 컴플렉스를 인지하고 있지만 극복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애인인 예은에게 모두 배설하려 하며 이해를 강요한다. 결국 집착은 최악의 선택으로 발전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완벽히 이해해줬으면 하는 마음은 아마 대부분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라면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내 생각과 방식을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둘 사이의 권력관계가 생겨 더 이상 원활한 소통이 어렵다는 걸 깨닫는다면 과감히 관계를 정리할 용기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론과는 다르게 누군가와 깊이 관계를 맺고 푸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영화 월프라워의 주인공는 '평범한 연애'가 드문 현상을 두고 질문한다.

"왜 좋은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과 만나는 거죠?" "우리는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만큼만 사랑받기 때문이란다."

사실 우리는 미성숙하기 때문에 미성숙한 사랑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청춘시대>는 이 에피소드를 통해 사랑하기에 실수하는 우리 청춘들의 모습을 비춰준다.   



좋은 남자 ≠ 슈퍼히어로 


한편 <청춘시대>에는 좋은 남자도 등장한다. 재완(윤박)은 남자가 보기에도 진짜 멋있는 캐릭터다. 자신이 좋아하는 진명에게 배려심 깊고 진지하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한다. 갈수록 상황이 나빠져만 가는 진명을 도와주려 하지만 야속하게도 진명은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이 드라마가 현실적인 이유는 멋있는 남자 캐릭터라고 해서 모든 상황을 타개할 능력을 갖추진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명의 어려움에 같이 아파할 뿐 상사에게 제대로 항의하지도 못하고 진명에게 나만 믿고 따라오라고 말하지도 못한다. 그동안 어떤 어려운 상황이라도 쉽게 해결하는 '재벌남' 또는 '능력남'이 나오는 드라마는 너무 많았다. 현실에선 우리 남자들도 주변의 여자들처럼 대부분 힘든 처지에 놓여 있음에도 그런 비현실적인 묘사 때문에 원치 않는 부담감에 시달려야만 했다.

<청춘시대>는 억지스러운 환상을 그리는 대신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사랑은 계속된다'가 아니라 '모든 어려움 속에서는 사랑도 사치처럼 느껴진다'라는 것을 현실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진명이 재완과의 데이트를 홀로 상상하는 장면은 너무도 슬프다. 시청자들은 그 사랑이 얼마나 아픈지 생각하며 또 다른 '돈 없는 청춘'들과 소통한다. 이들에게 "그리 젊은데 왜 연애를 안하냐?"란 말은 얼마나 잔인한가. 


쉬운 삶이란 없다 


<청춘시대>의 주인공 다섯 명은 모두 큰 결핍을 가지고 있다. 예은은 자신만이 유일한 정상인임을 거듭 주장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비정상으로 규정함으로써 자신을 정상으로 끌어 올리려는 시도는 공허하기만 하다. 왜냐하면 예은의 내면 깊숙한 곳에 애정결핍이 자리하고 있듯이 누구에게나 결핍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쉬운 삶'이란 없다. 이나는 '스폰서' 남성들의 애인을 대행하며 돈을 받으며 살아간다. 자신의 외모를 돈으로 구입하려는 남성들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그녀의 삶 역시 쉬운 삶만은 아니다. 어린 시절 죽음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이후 항상 죽음의 공포를 안고 살아가는 이나에게 미래에 대한 계획은 없다. 그렇다고 스스로의 성을 상품화하는 이나의 행동을 옹호하고 싶진 않다. 극중 진명과 같이 비참한 상황에서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 세상의 '오뚜기'들이 버젓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게 돈을 번다고 쉽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은 이나 또한 잘 알고 있다. 일반의 삶을 포기한다는 것은 가족과 친구와의 유대를 포기한다는 것이며 언제든 '창녀'라는 멸시를 받을 각오가 되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그런 이나에게 진명은 질투와 선망의 대상이다. 멋없지만 살기 위해 아득바득 노력한다. 그러면서도 자존심이나 당당함은 잃지 않는다. 이렇게 대비되는 둘은 서로를 갈라두고 혐오의 감정을 키우기도 했지만 일련의 사건을 통해 둘이 다른 길에 서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진명 역시 좀 더 쉬운 길은 없을까 고민한다. 하지만 쉬운 길이라 생각한 길은 더 어렵기만 하고 고난의 길은 끝이 보이지 않아 포기하고만 싶다.

이나, 진명 표면적으로 전혀 달라보이는 둘은 이렇듯 닮아 있었다. 철저히 외롭게 싸우는 삶에서 너무 지쳐 살아가는 의미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재완이 진명에게 삶의 밝은 면을 보여 주었듯, '좋은 남자'인 이나의 스토커 아저씨가 핵심적인 도움을 준다. 이나에게 앙심을 품고 접근했지만 이나를 이해하고 용서해 죄책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게 한다.

그녀들은 여전히 쉽지 않은 삶을 살겠지만 포기하지 않을 듯 보인다. 결핍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삶이더라도 '살아가는' 그 자체의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청춘시대가 말하는 소통


<청춘시대>는 12회 동안 타인을 향한 공감이 말처럼 쉬이 실천 가능한 것이 아님을 거듭 보여준다. 특히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오늘의 세상에선 하소연할 창구가 더욱 부족해 상처가 곪곤 한다. 모든 것이 개인의 탓으로 돌려지는 세상이다. 어쩌면 공감보단 혐오가 더 싹트기 쉬운 열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처절한 '현실'을 그리는데도 절망이 깃들지 않은 이유는 공동체라는 희망을 남겼기 때문이다. <청춘시대>에서는 아픈 청춘들이 '벨 에포크'로 모인다. 서로의 상처를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치료할 수도 없지만 '나 혼자만이 아니다' 그 자체만으로 큰 위로가 된다. 

더불어 사는 경험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기, 그리고 그 자체로의 나를 사랑하고 다른 이들을 인정하는 법을 배우는 것, 이것이 <청춘시대>가 말하는 소통이다. 

<청춘시대>는 12회라는 짧은 분량이 정해지면서 마무리가 다소 급해진 듯하다. 완성도에 흠이 생긴거 같아 아쉽다(개인적으론 혜수 가족 에피소드가 공감이 어려웠다). 그래도 별다른 기대를 받지 못했음에도 자신의 역을 훌륭히 소화해낸 연기자들과 스태프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시즌 2에는 하메들의 대학 졸업~ 취직 초를 더 완성도 높게 그려낸다면 재밌지 않을까 싶다. 아예 다른 버전으로 젊은 남자 청춘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드라마도 환영한다. 충분히 좋은 소재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청춘시대>라면 믿고 볼 수 있다.



Cf . 추후에 작가의 인터뷰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원제는 '벨 에포크'였다고 한다.

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210&g_serial=978614&rrf=nv

인터뷰 中

-제목은 '청춘시대'지만, 박연선 작가가 이 드라마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청춘'이 아니라 '소통'이었다. 그는 애초 제목이 '청춘시대'가 아닌 '벨 에포크'였음을 알리며 "청춘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며 "한 집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 했다. 그렇게 시작하다보니 청춘들이 나오게 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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