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하루 러시아에 빠져들다.


장소의 이동과 더불어 시간까지 이동한 생생한 느낌들. 그림 같은 예배당 속 풍경. 풍요와 친절이 넘치는 러시아를 만나며 점점 더 러시아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수즈달

오늘은 유난히 낮이 짧아지는 느낌이다. 한낮의 기온이 26도나 되었지만 아침저녁으로 계절이 지나가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다. 위도가 높은 지역이라 그런지 환하고 큰 보름달이 하늘 위가 아니라 바로 내 등 뒤로 가깝게 보인다. 음력으로 며칠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추석이 다가왔나 보다.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씩 내가 꿈 속이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수즈달은 그중에서도 실감 나는 중세의 풍경화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커다란 크렘린에 남아있던 건물을 개조한 박물관엔 볼거리가 많았지만 작은 교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러운 물건들을 보는 동안 저절로 거기서 지냈을 아이들이 떠올랐다. 작은 교실 창문 너머로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은 몇 백 년 전과 똑같았을까?


아무리 둘러봐도 지금이 21세기라는 어떤 표식도 없다.


박물관에서 나오니 건너편 언덕에 보이는 교회 , 그 아래로 흐르는 강은 한 폭의 그림. 노 젓는 연인들이 가끔씩 그림 속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나를 진짜 중세로 데려간 것은 박물관이나 그림 같은 풍경이 아니라 염소 떼를 몰고 오는 여인이었다. 막대기를 들고 씩씩하게 염소 떼를 모는 여인이 저 멀리서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에 마음이 설렌다.


커다란 황소 옆을 지날 때 숨이 멎을 만큼 무서웠지만 씩씩하고 용감해 보이는 그녀를 의식하며 보란 듯 태연하게 지날 수 있었다.


드디어 그녀가 그림 속에서 점점 튀어나와 바로 내 코 앞을 지나갈 땐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리고 신기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때 묻은 작업복 앞치마가 어느덧 중세 속에 들어와 있는 바로 내 옆을 스친다.


그런데 뜻밖에 가까이서 염소 떼들을 마주치자 더럭 겁이 나고 오금이 저렸다. 생각보다 뿔이 굵고 날카로워 보였고 눈동자도 상상했던 것보다 공격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조금만 멀어져서 안전해지면 거짓말처럼 다시 한 없이 사랑스러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여인의 고된 일상도, 염소 떼들도, 새끼를 밴 황소도 , 가까이 볼 때와 조금 멀어질 때 이렇게나 많이 마음이 달라지다니! 결국 낯선 일상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만드는 것이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차에서 점심을 먹고 박물관 뒤 쪽에 있는 마을로 산책을 나갔다. 조금 전 전원풍경과는 전혀 다르다. 악사들의 연주가 여기저기서 흥을 돋우며. 신기하고 예쁜 물건들로 가득 찬 거리는 걷기만 해도 신났다. 주로 국내 러시아 관광객들을 상대로 하는지 물가도 훨씬 쌌다. 방금 전 성당 박물관에서 150에서 200루 불하는 자석이 30루블이었고, 모두 정가 표시가 되어 있었다. 신난다. 예쁜 자석 몇 개를 싼 값에 사고 또 부자가 되었다.


코스트로마

아침 일찍 볼가강변의 수도원으로 자리를 옮기니 아름다운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멋진 일출 쇼를 보여주던 하늘은 햇빛을 그대로 둔 채로 비를 뿌린다. 믿을 수 없이 신비로운 모습 빛 속의 비.


그 속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호사를 누리고 산책길에 나섰다. 작은 오솔길을 걷다가 끝이 막혀있을 것 같다며 남편이 돌아가자고 했지만 끝까지 가보자고 했다. 큰 성(수도원)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은 오솔길은 커다란 성을 끼고 한참 동안 이어졌다. 아무도 없는 길이 계속되자 조금 불안해질 무렵 오솔길 끝에서 종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은은하던 종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갑자기 큰 길이 나왔고 잘 차려입은 주민들이 삼삼오오 성당으로 들어간다. 갑자기 순간이동으로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성당 입구에서 망설이는 남편의 손을 이끌고 주민들의 뒤를 따라갔다. 낯선 곳에서 그곳의 주민으로 살아보는 것 그것이 내가 여행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라오스에서 산 스카프를 두르고 러시아 정교회의 신도가 되어 성당의 한 구석에 섰다.


마침 맞은 편에 성가대가 있었고 우리가 좀 일찍 들어갔기 때문에 예배 전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모두 남자들로만 구성된 성가대를 보고 아직도 남성 중심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구닥다리 종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장난기 어린 자유로운 언행들에 미소가 지어졌다. 심지어 그들은 예배 중에도 다른 성가대원의 파트가 진행될 동안 혹은 자기 차례 바로 직전 거침없이 목을 가다듬는 소리를 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하모니는 따뜻하고 웅장하게 나를 감싼다. 어느새 난 천상에 있는 느낌.


잠시 후에 앞 쪽 무대의 문이 열리고 비밀의 공간이 나타났다. 남편은 그것이 천상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 안에서 나온 사제가 말할 수 없이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입었다. 천상의 사람이다. 박물관에서 보던 것보다 더 화려해 보인다. 그리고 또 다른 사제가 향로를 가지고 사람들 사이를 다니며 희 연기를 피워낸다.

저 연기가 사람들의 죄를 씻어 주는 걸까?


노약자를 위한 의자가 성당의 가장자리에 있었지만 있는 힘을 다하여 서 있고자 하는 한 할머니가 가까이 보인다. 함께 온 어린 손녀가 자리에 앉아서 따분해하는 몸짓과 대조적이다. 할머니의 경건함과 아이의 따분함이 둘 다 순수하고 아름답다. 조용하면서도 엄격한 분위기지만 가끔씩 행인이 들어와 신께 인사를 하고 나가기도 한다. 그 자유로움과 관대한 개방성이 인상적이다.


우리는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신도들이 예배 시간 동안 느끼는 몸의 고통도 함께 체험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자유로운 영혼의 성가대 소리가 천상의 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공간이 나를 계속 붙잡았다.



라시토프 영주의 성

그동안의 러시아 여행도 좋았지만 요즘 우리는 하루하루 러시아에 빠져들고 있다. 모스크바에 먼저 도착하신 별이님네가 그동안의 피로가 다 풀릴 만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고 연락하셨는데 우리도 그 큰 도시를 좋아하게 될까 조금 의심이 된다.

아침 일찍 도착한 라시토프의 커다란 주차장은 한산했다. 차를 주차시키고 마을을 돌아다니니 부지런한 관광객들이 눈에 띈다. 마을 전체가 이미 박물관 같은 느낌이라 굳이 영주의 성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성에 들어가니 여기저기 볼거리들이 우리들을 유혹했다. 입장료를 내는 곳이 많아서 마지막 장소인 정원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관리인이 선택하면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고 남편도 정원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결국 들어가기로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하다. 정말 중요한 추억을 놓칠 뻔했기 때문이다.


평소 정원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를 많이 한 남편은 영주의 성에 있는 정원은 젓과 꿀이 흐르는 에덴동산처럼 풍요로운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곳이라고 했다. 성 안의 수많은 농노들이 믿고 따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눈에 보이는 상징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정원 안에는 보통보다 훨씬 크고 튼실한 야채와 과일들이 재배되고 있을 거라고 했다.


정원을 들어서는 초입에 푸짐하게 담아 놓은 사과 바구니에 벌써부터 마음이 넉넉해진다. 바로 옆에 수도가 있어서 씻어 먹을 수 있다. 상큼한 사과를 한입 먹으니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정원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 굵직하고 탐스러운 사과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주머니에 한 개 넣었다. 사과나무에 큼직한 사과들이 내 손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곳에 주렁주렁 달려서 따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쯤 관리인 아저씨가 다가왔다.


내가 사과를 줍는 걸 보고 경고하러 온 줄 알고 창피해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관리인이 나보고 나무를 고르라고 한다. 갑자기 어안이 벙벙. 얼떨결에 고른 나무를 장대로 흔들더니 마음껏 주워가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어차피 떨어질 것을 미리 떨어뜨리는 것이므로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는 비밀이라는 듯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쉬~~라고 한다.


우리는 들고 있던 가방에 사과를 잔뜩 넣고 정원 한 편에 세워두었다. 어차피 정원엔 지금 우리뿐이니까. 우리는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포도나무도 발견했다. 아무도 따먹지 않아서 주렁주렁 열린 채로 건포도가 되기 직전이다. 몇 알 먹어보니 아주 달고 맛있다. 그리고 드디어 남편이 말하던 풍요의 상징들을 찾아냈다. 비현실적으로 큰 배추며 무, 당근 호박 등... 어린애마냥 신기하고 놀랍기만 하다.

꽃차와 아이스크림

하루 종일 돌아다닌 다리를 이제 좀 쉬어줄 때가 되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름다운 분위기의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마음이 넉넉해진 덕분인지 비싸 보이는 레스토랑을 겸한 카페에 겁도 없이 들어갔다. 그런데 막상 메뉴판의 가격이 믿을 수 없이 싸다. (계산을 할 때까지도 우린 가격을 잘못 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러시아는 어디나 커피가 비싸다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보다 저렴한 차와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싼 가격이라 기대하지 않았고 혹시 비싸다 해도 이 아름다운 공간에서 쉴 수 있는 입장료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잠시 후에 나온 차와 아이스크림을 보고 우리의 얼굴이 미소로 환해졌다. 물이 식지 않도록 함께 나온 촛불이 따뜻하게 느껴지고 앙증맞은 도자기 주전자에는 예쁜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1인 분을 시켰지만 잔을 두 개 가져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소가 환한 센스 있는 직원은 더운물이 없어지는 것을 보면 새로 가져다주기도 했다. 이 정도로 대접받으면 비싸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짝이는 은그릇에 담겨 맛도 황홀한 아이스크림에도 귀엽고 깜찍한 수저를 두 개 준비해 주었다.


계산서를 받아보니 꽃차가 105루블에 아이스크림이 60루블 거기에 10루블의 서비스 금액이 너무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바롭스크의 150루블짜리 바이칼 물을 경험했기에 우리는 더욱 감사할 수 있었다.


아름다운 풍광보다 맛있는 음식보다 친절한 사람들의 사랑이 여행자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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