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속 살 풍경

밤잠을 설친 덕에 만난 행복


밤새도록 옆 차가 시동을 켜놓는 바람에 잠을 설쳤다. 여간해서 불만이 없는 남편이 트럭 운전수를 원망했다.

" 저분은 왜 많은 빈자리를 놔두고 하필 캠핑카 바로 옆에 주차했을까?

"놀러 다니는 주제에 피곤해서 주위를 신경 쓰지 못한 운전수를 원망하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야"

아직도 나는 ‘논다’는 것에 대한 죄의식이 남아 있던 것 같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트럭 카페를 다닌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는데 주변의 작은 마을이나 경치 좋은 자연 속으로는 본격적으로 들어가 보지 못했다. 길이 좋지 않아 잠시 산책 삼아 다녀올 수 있는 만큼만 기웃거릴 뿐이었다. 그런데 밤새 시동을 켜놓은 차 덕분에 처음으로 과감하게 주도로를 벗어나 보았고, 거기에서 생각해 보지 않은 러시아 풍경들을 만나게 되었다. 아름다운 숲과 투명한 호수, 작은 마을들, 그 풍경을 더욱 생생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준 사람들. 그 속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하고 가슴 벅찼다. 그리고 이후로는 트럭 카페에서 정박하지 않게 되었다. 불행한 하룻밤을 만들어준 트럭기사님께 감사할 뿐이다.

작은 마을일수록 사람들의 표정은 좀 더 부드럽고 온화해 보인다. 매일 여유롭고 평화로운 풍경 속에 머무르며 우리는 점점 작은 마을이 더 편안한 시골쥐 부부가 돼가고 있었다.


러시아의 속 살을 만난 날들 중 일기 두 편


9월 17일 일기

블루 레이크


아침에 눈을 뜬 시간은 다섯 시 조금 전, 밖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고요하다. 왼쪽 창밖엔 나무들의 밑동과 낙엽이 노랗게 깔린 땅이 보이고 오른쪽 창밖엔 나무 위에 앉아 있는 새들이 손에 닿을 것 같다. 기온은 5도. 따뜻한 옷과 담요, 그리고 따끈한 차 한잔과 음악을 즐기며 밖에 나가지 않고도 풍경을 온전히 즐길 수 있다. 아주 가까이에서, 아니 그 안에서. 오랜만에 친구와 가족에게 카톡도 보낸다. 신기하게도 이런 숲 속에서 사진도 잘 보내진다


어제 이야기

아이폰은 이 지역의 이름을 쿠르간이라고 한다.

광민 씨는 사유지인 것 같다며 들어가길 꺼렸지만 난 사유지여도 좀 부탁해 보거나 혹은 주차비를 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근처에 커다란 음식점이 있으니 저녁에 손님이 가고 나면 주인에게 물어봐서 빈터에 주차 좀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망설이는 광민 씨를 부추켜서 무조건 숲 사이로 난 길을 가보기로 했다. 처음엔 차를 놔두고 걸어가 보자고 했지만 광민 씨가 차를 가져가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해서 구불구불 이어지는 숲길을 들어서기 시작했다.(심하게 굴곡진 길에서 아톰이 춤을 추자 나는 불안해서 차를 세우자고 하고 광민 씨는 그냥 가자고 한다. 난 호기심이 이끄는 데로 결정했다가도 금방 후회하고 광민 씨는 신중하게 생각하지만 한 번 결정하면 좀처럼 바꾸질 않는다.) 막상 들어서니 사유지는 아닌 것 같았고 공원 같은 느낌이었는데 숲 사잇길로 가끔씩 차가 나오기도 하고,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가 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숲 너머에 마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우리 눈 앞에 나타난 것은 엉뚱하게도 가족들의 피크닉 장면. 어른들은 수박이며 많은 음식들을 내놓고 고기를 굽고 있고, 아이들은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다. 소나무 숲 앞에 작은 모래언덕이 있고 그 아래로 내려가니 맑은 호수기 나타난다. 해변처럼 하얀 모래사장과 새파란 하늘을 담은 호수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예상치 못한 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장면은 우리가 다른 세계로 들어왔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난 어린애 마냥 신나고 즐거웠다.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는 호수와 숲이 잘 보이는 자리를 골라 이사를 했다.


저녁 준비를 하려고 내가 차 안으로 들어간 사이 놀러 나온 가족과 광민 씨가 대화를 한다. 러시아어로!!! 광민 씨는" 블라디보스토크"라고 말하고 손가락으로 반원을 그어 보이며 다시" 모스크바"라고 말했다고 한다. 광민 씨가 할 수 있는 말은 러시아의 지명뿐이었고 나머지는 느낌으로 서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볼걸... 조금 후회하는 마음이 생긴다.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이것이 나의 숙제 중의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9시가 넘은 시간 밖이 조용했다. 캠핑 온 젊은이들도 떠난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오니 별이 쏟아진다. 꿈에 그리던 장면 속에 우리 단 둘이 생생하게 마주 서 있다. 난 어린아이처럼 신이 나서 광민 씨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칠흑 같은 어둠마저 로맨틱하게 만들어주는 내 남편, 그리고 우리를 아늑하게 품어주는 캠핑카.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할까?


그리고 다시 지금

새벽에 일어났을 때는 정말 아무도 없었다. 아직 안개가 자욱한데 광민 씨가 산책하고 오제서 반대했다. 여기서 호수와 숲이 다 보이니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나가자고 했다. 안갯속에서 우리는 차를 마시고 글을 쓰고 아침을 먹고 처음으로 김치까지 담갔다. 며칠 동안 절여진 배추는 비닐봉지 안에 쏙 들어가서 양념을 넣고 흔들어 봉지채 플라스틱 용기에 담으니 너무 쉽다.


해가 조금씩 떠오르며 물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하고 호수에 빛보석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밖으로 나갔다. 수면 내복에 웃옷만 걸찬 차림으로. 주머니에 요가 음악을 틀어놓고 요가를 시작했다. 나중엔 손도 땅에 직접 대고 했는데 손에 흙이 전혀 묻지 않았다. 양말까지 벗으니 더욱 마음이 자유로워진다. 바닷가처럼 고운 모래사장이 드넓게 펼쳐져있다. 드넓은 무대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리고 호숫가로 가서 파란 하늘이 가득 담긴 물로 세수를 했다.


아직도 우리 둘 뿐이다.

아름다운 순간을 완벽히 소유한 기분.

너무 부자가 돼서 가슴이 터질 것 같다.


9월 21일

천사들과 함께 춤을!!


마을 입구에도 커다란 공터가 있어서 잠잘 자리는 충분했지만 좀 더 아늑하고 조용한 자리를 찾아 마을 안 쪽으로 들어왔다. 지금 있는 곳은 작은 교회 앞. 앙증맞은 교회들을 지나칠 때마다 아쉬웠는데 이런 그림 같은 교회 앞마당이 우리 집이 되었다.


차를 주차시켜 놓고 마을을 잠시 돌아다녔다. 이 마을엔 빨간 머리 앤이 살 것 같은 작고 예쁜 다락방이 있는 집들이 많다. 정원도 예쁘게 손질되어있고 닭들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는 중년 부부의 모습이 동화책 속 한 장면이다. 길에서 마주친 할머니의 따뜻한 미소가 우리를 무장해제시킨다. 작은 마을일수록 사람들의 표정은 좀 더 부드럽고 온화해 보인다. 러시아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웃는 표정 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긴다는 얘기를 들어서인지 그 미소가 더욱 따뜻하게 느껴진다. 할머니의 무척 느린 걸음걸이도 참 좋다. 나도 좀 더 천천히 할머니의 걸음걸이를 따라하며 할머니의 친절한 마음과 여유를 배워본다.


우리가 차에 돌아오고 나서 얼마 후부터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한 모터 소리와 함께 매연을 뿜으며 빠른 속도로 우리 차 주위를 계속 돌아다녔다. 너무 많이 그리고 점점 더 가까이 나는 소리에 창문 커튼을 조금 열고 내다보았다. 멀리 보이는 모습이 어른 같진 않았다. 혹시 동네 불량배일까?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할 때쯤 가까이 오는 소년을 보고 광민 씨가 문을 열고 나간다. 조 선생님의 이야기가 생각나서 좀 두려웠지만 정작 우리 앞에 나타난 소년은 우리가 두려워하기엔 너무 어린아이였다.


소년의 이름은 덴이고 11살이라고 했다. 그리고 차례차례 친구들을 데려와서 우리 차 문을 두드렸다.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호기심에 가득 찬 아이들이었다. 처음엔 다니엘이라는 10살 소년을 데려왔고, 그다음엔 11살 아리샤와 15살 마샤도 함께 왔다. 마샤는 두 살 된 마르까를 데리고 있었다. 마샤가 들고 있던 필통 크기의 원통 모양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신나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샤는 나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집중하기 위해 잠시 음악을 껐다.


아이들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우리의 이름과 나이 직업을 알고 싶어 했고, 여기가 맘에 드는지 궁금해했다. 가장 어린 다니엘이 이름이 뭔지 나이가 몇 살인 지물 었고, 투어리스트라는 간단한 영어단어를 말하기 위해 한참 궁리했다. 중요한 내용을 서로에게 알려주는 통역사가 된 양 신중하게 말하는 모습이 너무 귀엽다. 자신의 나이부터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나이를 말할 때마다 뒤로 돌아서서 손가락을 사용해 열심히 숫자를 세며 연습하고 말해준다. 두 살짜리 마르까는 처음에 좀 낯설어하며 마샤의 뒤에 자꾸 숨었지만 잠시 후엔 마샤가 틀어준 음악에 맞춰 엉덩이를 흔든다. 마르까 덕분에 모두 마음이 편안해지고 금방 친해진 기분이 되어 잠시 마르까처럼 함께 몸을 흔들었다. 그리고 다 같이 오래된 친구들처럼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그림책 속으로 들어온 착각마저 드는 곳에서 예쁜 천사들과 춤추는 내 모습. 전혀 생각해 보지 못한 장면이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지금껏 달려왔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한국 이름도 외우기 힘들어하던 내가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도 까먹지 않고 한 명 한 명 불러주었다. 아이들은 보기 드문 낯선 외국인이 자신들의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신기한 듯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다. 생각해보면 관광지도 아닌 작은 시골 마을에 외국인이 찾아간 적이 별로 없었을 것 같다. 멀리에서 찾아온 생김새가 전혀 다른 우리를 보고 얼마나 신기했을까?(러시아는 다민족 국가지만 우리가 이 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은 거의 슬라브족으로 보였다) 그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빛들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다정하게 불러본다. 덴, 다니엘, 아리샤, 마샤, 마르까..

점심때 먹다 남은 소시지와 빵 과일을 안주삼아 맥주 한 캔을 나눠마시는 것으로 저녁을 대신하니 너무 여유롭다.

마음도 배도 모두 부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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