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가장 큰 도시 모스크바, 가장 아름다운 도시 상트페테부르크를 즐기느라 시골쥐 부부들은 너무 힘들었다. 작은 마을들을 다니며 조금씩 적던 일기도 쓰지 못했다. 그래도 겨울이 오기 전에 러시아를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은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 여기며 러시아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을 잘 챙겨 보려고 노력했다.
비바람 속 모스크바는 날씨만큼이나 우리에게 힘든 여정이었지만 늘 이런 힘든 여정 뒤엔 선물이 기다린다. 첫 번째 선물은 고리끼 공원이었다. 커다란 그리스식 하얀 기둥이 궁전으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보였다. 파란 하늘과 어우러져 최고의 날씨였고 잠깐 지나가는 길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오전 내내 공원을 즐겼다.
처음에 만난 길은 직선으로 시원하게 탁트였지만 끝까지 걸으면 다리가 아플 것 같았다. 그나마 멋진 낙엽들을 커다란 기계를 동원하여 모조리 쓸어내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어딜 가나 보이는 영웅들의 동상들은 왠지 전체주의의 흔적 같아서 불편하다.
그런데 잠시 후 아늑하고 울창한 숲과 호수가 그림처럼 어우러진 풍경이 나타났다. 다람쥐들은 먹이를 숨기고 있고, 하늘색을 그대로 담아낸 호수에선 백조가 놀고 있다. 아직 문 열지 않은 아름다운 카페 뒤엔 깨끗한 무료화장실도 있다. 그런데 이 넓디넓은 공원에 화장실이 달랑 두 개, 그것도 개방 시간이 조금씩 다르다. 문 앞에 개방시간과 관리 시간이 쓰여 있다. 러시아는 화장실 개방보다는 낙엽 청소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것 같다.
생각보다 넓은 공원 뒤편엔 커다란 강이 흐르고 건너편으로 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다리는 넓은 실내공간과 외부로 나뉘어 있었다. 천정과 벽이 온통 유리로 덮여 실내지만 답답하지 않다. 추운 러시아의 겨울에 따뜻하게 경치를 즐기며 이 다리를 건널 수 있겠구나...
여기도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의 손 길이 바쁘다.(러시아는 대부분 공원이 넓고 관리에 정성을 많이 쏟는 것 같다)내가 익힌 러시아 실력을 발휘할 기회. 아주머니들께 러시아어로 인사하니 환하게 웃어 준다. 그 미소 덕분에 뿌듯해진다.어느덧 다음 나라 말도 연습할 때가 된 것 같다.
먼 길을 돌아 다시 카페로 와서 브런치를 먹기로 했다. 이제 막 문 연 카페는 우리 밖에 없어서 우리가 주인공이다. 카페 직원들도 친절하고 값도 착하고 무엇보다 오랜만에 맛있는 커피에 남편 얼굴이 환해졌다.
카페에서 나오니 햇살이 훨씬 따뜻하다. 그런데 남편이 넓은 잔디 언덕 위에 매트를 발견했다. 잔디 위에 자유롭게 깔려있는 커다랗고 푹신한 매트는 나에게 마지막 남아있던 러시아의 딱딱한 이미지를 한꺼번에 날려버린다. 우리는 그 위에 벌렁 누워 드넓은 하늘과 뭉게구름을 맘껏 즐겼다.
핀란드 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네바 강 하구에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큰 도시지만 왠지 삭막하지 않았다. 해변같이 넓은 모래사장과 운하들이 여유를 주었고 도시 곳곳에화려한 야경이 밤거리를 춤추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도시는 만들어진지가 불과 몇 백 년 안됀다. 1703년 표토르대제에 의해 이 도시가 완성되기 전까지 이 곳은 대부분 습지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고 한다.수 많은 돌로 습지를 메워서 만들었다고 하며 이 과정에서 많은 노예가 혹사당하고 습지에 던져저서 뼈위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고.
반석 혹은 돌을 의미하는 이름을 가진 황제가 돌로 도시를 만들었다니 이름에 운명이 들어있던 것인지 이름으로 명분을 만든 것인지 모르겠다.(표토르,페테르는 반석을 뜻하는 베드로의 러시아식 표기이다. 그런데 러시아 사람들은 상트베테부르크 라는 발음을 알아 듣지 못한다. '뻬쩨르' 라고 해야 알아듣는다.)
시베리아를 횡단할 때 차를 태워주었던 뻬쩨르출신 청년 ‘샤샤’가 이 곳에 도착하면 자기에게 꼭 전화하라고 번호를 주었는데 차마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래도 이 도시는 러시아 여행을 한껏 화려하게 장식해 주며 우리는 많은 선물을 헌꺼번에 받았다.
생일날 선물처럼 무지개가 나타났다. 그런데 밤이 되어 정박할 장소에 찾아왔는데 창밖에 무지개 빛깔이 선명하게 비친다. 그것은 커다란 쇼핑센터 전체를 덮은 대형 네온사인이었다. 나는 어린애처럼 신기했다. 왠지 나를 위한 좋은 선물이 저 안에 가득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당장 그 속으로 들어갔고, 그동안 그토록 갖고 싶었던 양모이불을 사 가지고 나왔다. 2만 원이라는 가격 때문에 진짜가 아닐 거라는 남편의 말에 이불 한 귀퉁이에 미어져 나온 솜을 태워보려고 보관했다. 남편이 타는 냄새를 맡아보면 알 수 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 내내 남편은 그걸 태워보지 않았다.
그 날 우린 너무 따뜻하게 잤고 그래서 하나 더 샀으며 덕분에 영하의 날씨에도 끄덕 없는 이 이불이 진짜 양모이불이 아니어도 상관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난 이것이 양모이불임을 확신한다.
비록 고급은 아니어도 러시아 벌판마다 양 떼들이 가득하니 털이 싼 것도 당연하다. 고급 레스토랑의 작은 바이칼 물 한 병이 커다란 수박 세 통 가격인 걸 생각하면 물건 값은 때로 절대가치가 아니다. 더구나 러시아처럼 추운 나라에서는 양털 이불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 이므로 싼 것이라 생각된다.
너무 싼 양모이불 몇 개 더 못 사 온 게 아쉽다.
러시아를 여행하다 '반야'라는 러시아식 사우나를 알게 되었다. 하바롭스크에서 수영장까지 딸린 화려한 곳을 구경한 적이 있었지만 내가 가보고 싶은 곳은 주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소박한 곳이었다. 이제 러시아를 떠나기 바로 전이고 우리는 여행으로 피로가 쌓인 상태니 지금이 반야 체험의 마지막이자 가장 좋은 기회다.
구글을 찾아보니 몇 군데가 나왔다. 그러나 실제로 가 보니 주소에는 엉뚱한 건물들만 있다. 그래도 사우나의 주 고객층인 노인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모두 불발. 할 수 없이 주소에 적인 건물로 들어가 보았다. 혹시 뭔가 단서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곳은 병원이었고 간호사는 상담 중이라 그냥 나올까 하다가 마침 눈이 마주친 할머니 한분에게 용기를 내어 혹시 이 근처에 사우나가 있냐고 물어보았다. 난처한 표정으로 모른다고 하시며 간호사에게 물어보라는 시늉을 하신다. 내가 우물쭈물 상담 중인 간호사에게 말을 걸지 못하자 본인이 직접 일어나서 상담을 끊고 무척 중요하고 급한 일인 양 내대신 물어봐 주신다.
본인도 환자라서 병원에 왔을 텐데 생면부지 이방인을 도와야 한다는 책임감을 가지신 그분에게 너무 고맙지만 간호사에게는 부끄럽고 미안하여 할 수 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고마움과 부끄러움이 뒤범벅 되어 식은땀이 나는 순간이 지났지만 역시 대답은 모른다는 것이다.
실망해서 나오니 남편이 한 번 더 찾아보고 없으면 가자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지역을 몇 번이나 돌았는데 한 번 더 돈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제 거의 포기하는 심정이 되어 잘못된 구글 정보를 탓하며 대신 우연히 눈에 띈 극장이나 들어갈까도 생각했다.하지만 아직은 아쉬움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마침 우리쪽으로 걸어오는 한 할아버지에게 물어보기로 했다.그런데 놀랍게도 반야가 근처에 있다며 방향을 알려 준다. 너무 반가워하며 다시 힘을 내어 찾아봤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이제 진짜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근처에 개를 데리고 걸어오는 한 할머니를 만났다. 할아버지가 말했던 근처까지는 왔으니까 혹시나 하고 할머니께 다시 한번 물어보았다. 역시나 할머니도 할아버지랑 같은 방향을 가리키셨고 이번엔 우리가 이미 실패했던 길이었기 때문에 거기에 없었다는 시늉을 하니 우리랑 같이 가 주신다고 한다.
그런데 출발하려고 보니 따라오던 강아지가 안 보인다. 할머니께서 강아지 이름을 부르는데도 나타나지 않는다. 순간 가슴이 철렁.우리 때문에 강아지까지 잃어버리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할머니가 휘파람을 부니 강아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가 지나쳤던 길에 반야가 있는 건물이라고 예상할 수 없는 허름하고 칙칙한 두꺼운 철문에 아주 작은 반야 간판이 보인다. 보물상자라도 찾은 기분이다. 러시아는 추운 나라라서 두꺼운 철문 속에 가게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반야 역시 이렇게 숨어서 우리를 애태운 것이다. 무거운 두 개의 문을 열고 드디어 들어갔다.
입장료는 한 시간에 수박 20통 값 1000 루블(2만 원)이다. 우리 둘 만 사용하기에는 좀 부담되는 가격이지만 문화체험비로 생각하기로 했다. 침실과 거실이 딸린 넓은 사우나 시설을 단독으로 사용하는 호사를 어디 가서 누려 보겠는가? 커다란 수건과 목욕용품들도 주었다.
사우나 실에 들어가니 내가 궁금했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띈다. 하나는 양털 모자였다. 처음엔 양털로 만든 것인지도 몰랐고 싸구려 가벼운 부직포 로 만든 것이 시장마다 많아서 궁금했었다. 그 모자를 쓰고 사우나에 들어가니 머리가 하나도 뜨겁지 않았다. 시골 길마다 팔고 있었던 나뭇가지들도 어디에 쓰는지 궁금했는데 여기에 쌓여있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반야를 대중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증거들이 있는데 반야가 어디에 있냐고 했을 때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는 걸까? 유료반야는 개인적으로 오는 곳이라기보다 친구들이나 가족들이 그룹으로 와서 즐기는 곳인 것 같았다.
요즘은 서로 바쁘기도 하고 반야 비용도 러시아 물가에 비해 비싸므로 일반적인 도시 사람들은 이용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해 보기도 했다. 그래도 시장에 반야용 물건들이 많은 것을 보면 추운 러시아에 반야 시설이 많다는 것은 확실하다. 많은 궁금증들을 품어보며 소중한 한 시간을 꽉 채워 즐겼다.
러시아가 준 마지막 선물 반야에서 우리는 아주 새 사람들이 되어 나왔다. 몸도 마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