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휴가

에스토니아의 숲 속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친구들과 함께 가출을 하기로 모의를 한 적이 있다. 당시 톰 소오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고 모험을 떠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이 생겨 친한 친구와 모의를 했고, 이 모험을 성사시키기 위해 두 명의 아이를 더 모았다. 우리는 이른 봄에서 가을까지 거의 1년 내내 준비를 했었다.


그러나 막상 떠나기로 한 날이 가까워 오자 엄마가 나 때문에 걱정할 일을 생각하니 너무 슬퍼졌다. 내가 말을 꺼내자 아이들은 서로 자기 엄마가 더 고생을 많이 하고 불쌍하다며 눈물을 훌쩍이기 시작했고, 결국 모두 포기하기로 하였다.


친구 집 다락에 차곡차곡 모았던 곡식은 그동안에 벌레가 나고,농사를 짓기 위해 구했던 씨앗은 곰팡이가 피어 버렸다. 그것들을 처리하는 것도 모험을 떠나는 일 못지않게 어려웠던 것 같다. 통조림서 너 개씩 각자 나누어 가지고 헤어졌는데 그 통조림들을 부모님께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걱정이 태산이었던 기억이 난다.


어른이 된 후에도 난 숲을 좋아한다. 그러나 남편은 내가 좋아하는 숲은 원시의 숲과는 거리가 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내 머릿속에 있는 숲 속엔 나무나 풀들 혹은 새나 작은 동물들까지 있는데 벌레는 소리만 있다.


그러나 현실의 숲 속엔 벌레들이 득실거린다. 특히 날벌레... 공중에 떠다니는 날벌레들은 마치 힘을 모아서 나를 공격하기 위해 작전이라도 짜고 있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가끔씩 그런 날벌레 떼를 만나면 머리에 방충망이라도 쓰고 싶은 심정일 때가 많았다.

그런데 에스토니아 숲 속에서는 이런 날벌레떼들을 만나지 않았다.


헨젤과 그레텔이 나올 것 같이 키 큰 아름드리나무들이 울창한 숲 속은 아주 향기로웠고 거기서 지냈던 시간들을 적어놓았던 일기장을 드려다 보는 것만으로도 참 좋다.


10월 1일 밤 9시

캠핑카를 타고 처음으로 국경을 넘었다. 국경지대에서 만난 에스토니아는 바로 이웃인데도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새로 자동차 보험을 드는데 물가도 훨씬 비싸다. 우물쭈물하다 러시아 루블을 다쓰지 못하고 남기고 온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렇지만 에스토니아는 러시아보다 도로 사정이 훨씬 좋아서 작은 길로 연결되는 아름다운 숲 속을 즐길 수가 있다. 바람님이 국립공원이라고 하여 높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험난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어느 틈에 숲 속에 와있다. 그것도 냄새가 너무 좋은 숲 속에.


숲 속엔 우리를 위한 보물들이 많이 있다. 먹을 수 있는 수도가 있고, 러시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깨끗한 화장실에 바비큐 시설까지.. 우리는 찬찬히 둘러보고 물도 얻고 화장실을 비운 뒤 불장난을 시작했다. 바람님이 근처에서 도구를 찾아내 장작을 쪼갠다. 별로 해본 적도 없을 텐데 잘한다. 불도 잘 피운다. 차가운 숲 속이 장작불로 따뜻해지고 마음이 여유로워지자 바람님이 고기를 굽겠다고 한다.


여행 내내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서 우리한테 그런 준비물이 있는 줄도 몰랐다. 작은 석쇠 하나로 모든 것이 완벽했다. 불을 때며 만들어 놓은 숯을 이용해 태우지 않고 고기를 굽는 실력이 최고다. 개울물 소리를 음악 삼아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자꾸 이 순간이 마법처럼 느껴진다.


우리나라는 산에서 절대 불을 피울 수 없는데 이 곳엔 불을 피울 수 있는 시설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는 게 신기하다. 시간이 지나면 호박으로 변해버리는 마차처럼 지금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마법을 부려놓은 것 같다. 이 꿈속 같은 시간에도 바람님은 할 일을 잊지 않고 러시아에서부터 틈틈이 해오던 단열공사를 마무리했다. 그래서 낯 선 숲에서 더 따뜻하고 아늑한 밤을 맞이할 수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밤이다. 우리는 음악도 켜지 않고 있다. 숲 속의 주인이 아니라 손님이기 때문이다.


에스토니아에서의 첫날이 뜻밖에 황홀하게 지나간다.



10월 2일 오전 11시 30분

아침 비, 지금은 흐림


숲 속에서 두 번째 밤을 보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산책을 하다 전 날 미처 보지 못한 사과나무를 발견했다. 마법사가 깜빡 잊은 사과나무를 다시 가져다 놓았는지도 모른다. 맛있는 사과나무가 있는 그곳이 맘에 들었지만 바람님은 근처에 더 좋은 곳이 있다며 이사를 가자고 했다. 할 수 없이 사과나무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울퉁불퉁한 비포장 도로를 지나며 바람님에게 풍경에 너무 욕심이 많은 것 아니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눈 앞에 아담한 호수가 하늘과 숲을 담아 놓은 풍경에 나도 모르게 탄성이 저절로 나왔다.


원래 바람님이 가려던 곳은 더 들어가야 했지만 어려운 길이 나올지 모르니 나머지는 우리가 걸어서 다녀오자고 했다. 이 곳도 너무 훌륭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는 가장 평평한 곳에 집터를 정하고 근처 습지로 트레킹을 다녀오기로 했다.


바람님은 가볍게 한 시간을 예상해서 그냥 가자는 걸 내가 커피에 바나나 반 쪽 씩이라도 먹고 움직이자고 하길 정말 다행이었다. 습지의 한가운데 나무로 만든 산책길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전망대까지 다녀오는데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어젯밤 내린 비로 술은 더욱 생기 있었고, 가끔씩 웅덩이에 담긴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이 티 없이 맑고 깨끗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다리를 따라가다 전망대가 나왔지만 계단 사이가 너무 넓어서 꼭대기까지 올라가지는 못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니 습지가 더욱 광활해 보인다. 전망대를 지나서도 우리가 지나온 나무다리 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가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거기서 돌아왔다.


집까지 간신히 도착하자 허기가 진 상태인데 바람님이 고기를 구워 먹자고 제안한다. 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고기를 굽자고 했다. 빵 한 개 씩을 맛있게 먹고 닭다리 여섯 개를 모두 구웠다. 바람님이 뼈를 발라내어 구운 닭다리 여섯 개는 아주 맛있지만 양이 많아서 오늘 아침까지 먹었다.


바람님은 닭고기 뼈를 아주 잘 발라내고 고기를 하나도 태우지 않고 잘 굽는다. 버릴 게 없이 다 먹으니 배가 부를 수밖에..

바람님이 오늘 점심때 탈린에 가자고 했지만 내가 반대했다. 이렇게 좋은 숲 속에 머무르지 않고 어딜 간단 말인가!


오른쪽 창으로는 호수 그림이 걸리고 왼 편으로는 숲 쪽으로 이어지는 작은 오솔길 풍경화다. 앞에는 따뜻한 차가 보온병에 있어서 언제나 따라서 마실 수가 있다.


바람님은 숯불에 말린 양말을 신고 하릴없이 편히 누워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린다. 어딘 가로 갈 궁리 중일 것이다.


할 수 만 있다면 먹을 것이 떨어질 때까지 이 곳에 머물고 싶다.

조용하고 아늑하고 냄새가 좋고 편안한 곳에서


10월 2일 오후 4시 6분 두 번째 일기


오늘 하루 종일 여기 머물 수 있다는 안도감에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실은 조금 늦잠을 자서 좀 속상하긴 했다. 더 오랜 시간을 즐길 수 없다는 조바심에.. 그놈의 욕심. 언제까지 쫓아다닐는지.. 여행 한 달이 넘도록 떠나질 못하는 욕심..


어제저녁 9시 훨씬 전에 잠들어 오늘 아침 7시 훨씬 넘어 깨었으니 거의 11시간을 잔 것 같다. 요 며칠 우리 부부의 아침잠이 많아졌다. 해가 져서 어두워지면 잠자리에 들고 해 뜰 때 일어나니 겨울이 가까울수록 잠자리에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다. 원래 그게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으면 에너지를 과도하게 사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행 초반에는 5시 전 후에 일어나서 스트레칭도 하고 , 차마 시면서 간단히 일기도 쓰고, 아침식사를 다 마치고 8시 전후로 다음 목적지로 출발하곤 했었는데... 계절이 바뀌느라 몸이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환절기엔 몸의 건강을 더 잘 보살펴야 다음 여행에 지장이 없을 테니...

여행에서 이제 조금씩 여유를 찾을 수 있게 된 것 같아 다행이다.

동영상 액자

이 숲은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숲이다. 왼쪽 창문으로는 나무들 사이로 작은 오솔길이 보이고 숲 속으로 난 오솔길은 언제나 보기만 해도 설렌다. 눈 앞에 커다란 전나무의 밑동이 땅과 어울려 오랜 세월 만들어낸 부드러운 곡선이 아늑하다. 삼나무 뿌리는 평평한 땅에 쭉쭉 뻗어 자신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고, 내 창문으로 다가와 노크라도 할 것 같다. 오른쪽 창문으로는 호수가 보인다 호수는 하늘을 담고 나무들을 담고 한줄기 바람도 담는다. 오늘은 하루 종일 흐리고 비가 왔지만 잠시 해가 조금 나와서 호수에 은가루를 뿌렸다. 잠시 동안이라서 더욱 아름다운 해의 쇼를 감상했다. 그리고 새들.. 창밖에 날아다니기도 하고 먹이를 주워 먹기도 하고 서로 장난을 치기도 하는 새들의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니..


창 밖을 보고 있자니 문득 창문에 마술이 걸린 것 같은 착각이 든다. 그래서 난 바람님에게 우리의 창문을 동영상 액자라고 말했다.


이 숲엔 우리가 필요한 것이 다 있다. 안전하고 조용하고 깨끗한 숲. 이게 내가 바라는 살고 싶은 곳이다.

할 수만 있다면 이 곳에 더 머무르면서 지루해져 보고 싶다. 숲이 지겨워지고 사람 냄새가 그리울 무렵까지 이 숲에 머물러 있고 싶다.


10월 3일 맑고 흐리고 비도 조금



우리는 지금 에스토니아에 들어온 지 2박 3일째 처음으로 한 장소에서 머물고 있다. 엄밀히 말하면 작은 개울이 있는 숲에서 하룻밤을 자고 발트해가 보이는 멋진 해변을 지나 아름다운 호수와 숲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한 번 했지만 이동한 거리가 30분 정도 니까 거의 한 장소에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난 바람님에게 우리 여행에서의 휴가를 선언했다. 엉덩이를 들썩이는 바람님에게 반 강제적으로 이 숲에 더 머물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첫날 돼지고기 숯불구이를 시작으로 어제는 닭고기 구이에 오늘은 닭죽에 이르기까지 세 번이나 불 요리를 했다.

가끔씩 비가 오기도 하는 날씨였지만 바람님의 불 피우기 실력이 좋아서 아주 따뜻하고 아늑하다. 갑작스러운 도끼질에 어깨를 아파하는 것 같아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입장료나 체험료도 없이 이렇게 재미있는 놀이를 어디 가서 할 수 있을 것인가?


오늘은 내가 닭죽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그릇 탈 걱정을 하는 바람님에게 걱정 말라고 했다. 지금은 우리가 얼마나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어제 까지 두 번이나 구이 판을 닦아 보았지만 의외로 잘 닦여서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압력솥에도 제대로 물러지지 않던 단단한 쌀들이 아주 부드럽게 하나도 타지 않고 잘 되었다. 내일 아침 먹을 양까지 완벽하게 준비되었다

.

불은 음식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젖은 신발이나 양말을 말리기도 하고 장작불 앞에서 불울 쬐다가 뽀뽀도 하면서 재미있게 놀고 있다. 우리가 준비해 온 손바닥 만한 작은 접이식 의자와 숯 물구가 판 하나로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우리의 결핍은 매일 새로운 자원 활용법을 개발하는 원동력이 되어 삶에 활력과 재미를 더해준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

우리는 여행하면서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들이 쓰레기로 변하는 과정을 매 순간 마주한다. 쓰레기로 변하기 전 조금이라도 더 사용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쓰레기도 자원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원 중 하나는 종이박스다. 자체로 다른 물건을 보관하는 데 사용하기도 하고 다시 재단해서 수납공간에 맞는 가구로 만들기도 했다. 그러다 날씨가 조금 추워지자 재단하고 남아있던 박스 조각들은 우리 차의 카펫으로 멋지게 변신했다.. 그리고 냄비 받침으로도 그만이다. 이 냄비 받침은 바람님이 장작불을 붙일 때 부채로도 그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그러나 그을음이 잔뜩 묻은 냄비를 받친 후엔 그 용도를 신발 받침으로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물건들은 생각보다 훨씬 적을지도 모른다. 물건을 적게 갖는다는 것이 거꾸로 우리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경험들이 이 여행을 통해서 얼마나 어떻게 우리에게 쌓여갈지 재미있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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