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1일. 드디어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도착. 그런데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갑자기 여름에서 겨울로 바뀌었다. 동해항에 비해 조금 더 시원해지기는 했지만 두꺼운 옷이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러시아엔 여름이 없을 거라는 선입견을 갖는다던 러시아어 강사 말이 생각났다.
세계여행을 앞두고 가장 걱정이 많았던 나라는 러시아였다. 러시아를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이나 주행거리가 전체 여행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비해 러시아에 대한 정보는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과거 금단의 땅이었던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폐쇄적이며 딱딱한 이미지도 한몫했다. 영어가 안 통하는 경우가 많다는 블로그들의 여행후기를 읽고 유튜브로 러시아어의 알파벳인 끼릴 문자를 익히고, 숫자나 간단한 생존 회화(?) 정도는 연습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신기하게도 러시아 여행에 대한 걱정은 점차 기대로 바뀌어갔다. 덕분에 러시아에 도착해서 만난 거리의 끼릴 문자 간판들이 반갑기까지 하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여름옷 차림으로 러시아의 마지막 짧은 여름이라도 최대한 즐길 수 있는 준비가 돼있다는 것이 스스로 대견스러웠다.
몇 시간 후 불안과 초조에 떨면서 낯선 거리에서 헤매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구글 지도 사용이 아직 서투신 조 선생님네의 숙소를 찾아드리고 차까지 마시고 여유 있게 우리의 숙소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긴 여름 해도 넘어가려고 하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주소로 숙소를 찾을 수가 없다. 얇은 여름 티셔츠를 입고 의기양양했던 기분은 사라지고 불안이 시작된다. 그동안 공부했던 러시아어 몇 마디를 동원해서 가까스로 호스트와 전화 연결이 되었지만 도저히 알 수 없는 러시아어를 말하고 전화가 끊어진다. 건물마다 굳게 잠긴 두터운 철문들이 더욱 차갑고 낯설게 느껴졌다. 아무 대책 없이 주변을 맴돌며 집을 찾아 헤맸고 있던 이국에서의 첫날 저녁.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쫄깃거린다. 그러다 우연히 아이를 안고 나온 남자에게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알고 보니 그가 호스트였다. 너무 한가로운 그의 태도에 우리를 도와주는 이웃 주민인 줄 알았었다. 얼마나 당황했었는지 먼저 온 한국인 여행객 중 한 명을 그의 아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그곳에서 같은 배를 탔던 분들을 만났고 고맙게도 우리를 알아봐 주었다. 그분들도 우리와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한다. “배에서 너무 다정해 보여서 절대 부부가 아닌 불륜관계일 거라고 생각했어요”라고 해서 한바탕 웃고 나니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불행은 이어졌다. 다음 날 차를 찾으러 갔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연기되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숙소를 예약할 때 실수로 하루만 예약했는데 대게 당일에 차를 찾을 수 있다고 했고, 그렇지 않다 해도 하루 정도 머물 곳은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검색해보니 모든 숙소가 만원인 상태. 몇 시간 만에 겨우겨우 찾아낸 호스텔은 가격이 두배가 넘지만 고마운 마음으로 바로 예약했다. 이번에는 호스텔의 입구를 찾기 어려워 주변을 몇 번이나 또 맴돌아야 했다.(러시아에서는 숙소 찾기, 호스트와의 의사소통이 아주 힘들었다. 값싼 숙소라서 더 찾기 어려운 구석에 있었을 것이다.)
베트남 라오스 여행부터 호텔 예약은 내 몫이었고 아주 익숙해졌다고 자부했는데 정작 러시아 여행 출발점에서 실수하게 될 줄 몰랐다. 그래도 실수 덕분에 오게 된 호스텔은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서 전망이 좋았다. 그리고 젊은이들로 가득해서인지 활기찬 분위기도 마음에 든다.. 그들과 어울려 옥상 정원에서 바라본 야경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누울 수 있는 커다란 의자에 따뜻한 담요를 덮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따뜻한 차를 마시니 천국이 따로 없다. 첫날부터 좌충우돌하며 힘겨웠던 시간이 사르르 녹으며 벌써 기분 좋은 추억으로 만들어지는 순간 속에 잠시 머무르는 기분. 실수로 만들어진 우연을 다시 행복으로 만들어가는 퍼즐게임이 시작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최신장비가 갖춰진 정비소를 다녀왔지만 캠핑카 아톰은 하루하루 점점 더 심한 매연을 토해냈다. 그러더니 우수리스크를 지나면서부터는 속도까지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시속 20킬로 밑으로 떨어지자 절망감이 들기 시작했다. 시베리아 초입부터 이지경이 될 줄이야. 15년 된 아톰을 데려온 것은 결국 무리한 결정이었을까? 급기야 아톰은 하바롭스크로 넘어오는 언덕길에선 시속 10킬로도 내지 못한 체 기어가고 있었다. 언제 차가 설지 한 치 앞을 모르는 순간이었다. 그때 한 트럭 운전사가 앞질러 가서 우릴 보고 손짓했다. 조 선생님을 통해 여러 번 안전교육을 받았던 터라 나는 더럭 겁이 났는데 남편은 그 사람의 수신호를 받고 그쪽으로 향하더니 낯선 사람 앞에 대책 없이 차를 세운다. 그리고는 차에서 내린다. 그 사람의 허름한 옷차림이 나를 더욱 긴장시켰고, 조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나는 차를 지켰다.
그는 우리 차를 열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고 남편에게 손짓 발짓으로 설명을 한다. 한참을 차의 앞 뒤를 다니며 노력한 덕분에 아톰 상태가 훨씬 좋아진 걸 확인하고 우리 차를 출발시킨다. 우리 차가 안전하게 다시 속도를 내는 것을 보고 나서 손을 흔들어 주고 자신도 떠난다.
그 모습이 어느 영화배우보다 멋있어 보였다. 자신도 바쁠 텐데 부탁받은 적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의 차를 손에 검정까지 묻혀가며 도와주는 이런 사람을 만나다니.. 바로 이런 사람이 천사가 아닌가. 나는 그런 사람을 허름한 차림이라고 의심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 차가 하바롭스크 정비소에 도착하기 전에 절단 났을 수도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다행히 하바롭스크의 정비소에서 우리 차를 잘 진단했고 문제가 된 터보를 교체하였다. 그 과정은 매우 면밀했고 , 우리가 알 수 있도록 투명하게 진행되었다. (러시아의 정비소는 대단히 깨끗하고 정돈돤 분위기고 그래서일까 기술자들은 자존감이 높아 보였다) 15년이나 된 차라 엔진에 혹시 문제가 있나 걱정하였지만 기우였고 의외로 적은 비용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너무 빠르게 차를 교체해야 한다는 강박도 알고 보면 자동차 회사들이 만들어낸 전략이 아닐까 하는 의문도 생겼다) 차 안의 엔진을 깨끗이 청소하고 필요한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소소한 부품도 교체하였다. 이제 아톰은 새로 태어나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하바롭스크로 가던 그 언덕길은 우리 여행을 시작하기 위한 분만실과도 같았다. 모든 게 끝장날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때 이 언덕길을 떠올려보고 싶다. 우리의 긴 여행을 앞두고 우리를 단련시켜 주었던, 그리고 첫 번째 천사를 만났던 그 언덕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