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연다.
또 택배 박스다.
현관문만큼이나 큰 박스.
가구가 들어있을 법한 크기.
그 안에 가득할 것은 옷이나 신발일 테지.
그는 그가 사는 물건을 모두 기억이나 할까.
그와 실랑이하고 싶지 않다.
택배 상자는 못 본 척 다시 집에 들어선다.
나는 그와의 대화를 잃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가 싶던 말들을 쏟아냈던 과거의 그. 가령 나를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한다던가, 아프다는 내 말에 에이즈에 걸렸어도 널 사랑한다던가, 내가 없는 삶을 사느니 죽음이 더 낫다고 했던 말들이 떠올라 용기 내어 다시 그에게 다가갔지만 그때마다 나는 더 상처받았다.
그는 쇼핑과 골프에 몰두하며 나와 아이들을 보려 하지 않았다. 함께 살지만 우린 이미 남이다. 마음속으로 천 번도 더 되뇌인 이혼. 그는 나에게 상처받았다고 했다. 그 상처는 회복하지 못할 거라고도 했다.
나는 남편을 잃었다.
현실적으로 이혼을 생각해본다. 그는 우리가 사는 집, 우리의 자동차, 모아둔 현금 그리고 아이들의 양육권을 모두 가져가라고 했다. 이혼하게 되면 직장을 그만두고 우리나라를 떠나 정처 없이 살 거라서 앞으로는 양육비를 줄 수 없다고 자신에게 남은 모든 것을 가져가라고 한다
언젠가 불어오던 아카시아 향을 맡으며
우리가 함께 사는 이곳이
무릉도원이라 말하던
그는 이제 없다.
너무 낯선 그.
쌓아 놓은 물건만 가득해진
온기 없는
우리의 집을 떠나겠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