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버지의 암 소식에 10년이 훌쩍 넘은 엄마가 아팠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
2009년 4월.
엄마는 감기 치료를 오래 받았다.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이십 대를 누리느라 매일 보는 엄마의 얼굴이 노란빛으로 변해가는 것을 몰랐다. 너무 진해 갈색 빛을 띠는 소변과 흰색 빛을 띠는 대변을 본 후에야 엄마는 병원을 찾았다.
간경화였다. 엄마는 병원에 입원한 후로 복수가 차올랐고 대변을 스스로 볼 수 없었다. 저염의 식사와 관장으로 하루하루를 이어갔다. 엄마의 마지막을 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았다. 겨우 깜빡깜빡 잠드는 엄마는 문병객으로 쉴 수 없었다. 그 시절의 나는 오랜 시간 머무는 어른들이 야속했다. 엄마는 말했다. 내겐 길게 보였던 그 시간이 엄마에게는 길었던 인연들과 헤어지는 짧은 시간이었다고.
걷지도 먹지도 변을 보지도 못하는 엄마를 마주했다.
그 시절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엄마를 살리는 것만이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가정 주부로서 평범한 삶을 살았기에 과로한 것도 아니었다. 엄마가 간경화가 된 이유는 B형 간염 때문이었다. 평소 B형 간염으로 인한 불편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엄마였다. 병이 엄마에게 있는 지조차 몰랐다. 되돌아 생각하니 엄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공장 생활을 하던 당시 자주 체했는데 같은 방을 쓰던 언니가 소독하지 않은 바늘로 손을 자주 따주었는데 그때 병이 옮은 것 같다고 했다.
2003년
의사는 엄마의 간수치를 염려했다. 그러나 현재 수치로 약을 복용할 경우 보험 처리가 되지 않아 엄마가 바이러스 억제제인 제픽스를 먹을 경우 상당한 비용이 소요되니 무료로 제공되는 바라쿠르드라는 임상용 약을 먹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임상용 약을 먹지 않을 경우 자주 병원을 찾고 검사하자고 했다. 제안을 거절하자 의사는 좋은 기회라고 여러 번 재차 권했다. 나중에는 엄마에게 언성을 높이며 강압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의사로 인해 엄마는 병원을 바꾸게 되었다.
바꾼 병원에서는 2달에 한 번이 아닌 6달에 한번 검진을 오라고 했다. 엄마는 그렇게 6달에 한번 정기검진을 받으며 지냈다. 2009년 4월. 그 달은 간 정기검진이 있던 달이었다. 검진에 가기 전 급성으로 간경변이 오고 말았던 것이다. 만약 이전의 병원을 다녔다면 2달에 한 번이었을 테니 미리 알았을 것이다. 현재 제픽스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며 효과 좋은 약으로 평가받는 바라쿠르드. 그때 먹지 못했던 그 약은 의사가 권한대로 안전한 약이었다. 의사는 정말 엄마가 걱정스러웠고 엄마가 낫길 바랐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픈 엄마를 보며 그 의사를 떠올렸다.
의사가 권한대로
그때 바라쿠르드를 먹었으면 어땠을까.
순간의 선택은 인생을 다른 길로 인도한다.
2009년. 6월.
" 경주야 필요한 거 없어? "
친하게 지낸 선생님이 묻는다.
" 언니, 나 양말 하나만 가져다주라. 하루는 탈탈 털어 신고 다음날은 뒤집어 신었는데 오늘은 새 양말이 신고 싶네."
학교에서 처음으로 언니라고 부르라고 말해주던 또 언니라고 부를 만큼 친했던 선생님. (이후에도 다시는 언니라고 부르는 선생님은 없었다) 언니의 물음에 처음으로 나는 내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떠올려보았다. 겨우 양말 하나라니. 언니는 눈물이 맺힌다 했다.
그 시절의 나는 그랬다.
마치 행복하면 안 되는, 순간도 즐거우면 안 되는 사람인 것 마냥 매 순간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무겁게 지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 큰 벌이라도 받는 양, 최선을 다해 나를 외면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나는 간병의 시간을 최대한 즐겁게 지내고 싶다.
그 시절의 나를 만나면 말해주고 싶다.
" 너를 돌아봐도 괜찮아. 너도 웃어도 괜찮아.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어두울 필요 없어.
가끔은 웃어도 괜찮은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