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우중 Mar 01. 2021

삶에 갇힌 때 당신이 뮤지컬을 본다면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 감상평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지은 "돈키호테(1605)"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필자도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랬듯) 어렸을 때 아동용 소설로 돈키호테를 먼저 접했고, '미치광이 할아버지가 기사 흉내를 내면서 풍차에 돌진하는' 이야기 정도로 기억했다. 아마 어린이 만화판으로 돈키호테를 읽었던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이상하게 돈키호테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하면 칼을 차고 말을 탄 '기사'라는 직업에 대한 선망이 있었는데, 그게 그대로 돈키호테로 이어진 듯하다. (원작을 읽어보면 이러한 기사/기사도에 대한 선망이 이야기의 주요 소재이니 하니 엉뚱한 호감은 아니다)

류정한 배우가 연기하는 돈키호테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도 돈키호테를 뮤지컬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만 듣고 언젠가 봐야지 싶었다. 기회가 닿지 않다가 아내가 회사 할인표가 있다고 하여 보았다. (살면서 본 뮤지컬은 4편 정도지만) 뮤지컬 자체에 대한 호감이 있는 데다가 돈키호테 이야기라고 하니 재미있겠다 싶었다.


 처음에는 다소 실망했다. 내가 어릴 때 보았던 그 돈키호테 이야기가 아니었다. 막이 오르자, 원작자 세르반테스가 등장하는 게 아닌가. 그가 감옥에 갇히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죄수들과 함께 돈키호테 연극을 하면서 각자에게 배역을 준다. 세르반테스 본인은 직접 돈키호테 역을 맡아 연기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극이 시작된다. 낯선 구성에 일단 거부감이 생겼다. 나중에야 인터넷 검색으로 안 사실이지만, 모두 원작 소설을 반영한 구성이었다. (원작 소설에서도 액자식 구성이 나오고, 소설 중간에 작가인 세르반테스가 화자로 등장한다. 현대 소설의 시초가 여기서 나왔다.) 


 주인공 세르반테스/돈키호테 역을 맡은 류정한 배우는 이 공연에서 처음 보았는데 연기와 노래가 정말 뛰어났다. 공연을 볼 당시에는 필자의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지 특별히 감동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런데 공연을 보고 3일 정도가 지나자 공연이 계속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특히 첫 노래인 "Man of La Mancha", 스페인 풍의 경쾌하면서 말달리는 듯한 멜로디가 계속 생각났다. 유튜브로 조승우, 황정민, 정성화, 홍광호 배우 버전을 모두 찾아보기 시작했다. 다른 배우들의 영상과 비교해 보니, (라이브로 보아서겠지만) 개인적으론 류정한 배우의 연기와 노래가 가장 좋았다. 극 중 돈키호테가 노인이다 보니 50세이면서 성량이 풍부하고 가창력이 뛰어난 류정한 배우가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사실상 세르반테스/돈키호테의 1인 주인공이 극을 이끌어가는 뮤지컬인데, 산초 역의 정원영 배우도 연기와 노래가 모두 좋았다. 돈키호테야 미치광이니까 그렇다 쳐도, 정상인(?)인 산초가 왜 돈키호테를 쫓아다니는지 귀엽고 사랑스럽게 표현하는 노래 '좋으니까'가 특히 좋았다.


 유튜브에 '맨 오브 라만차'를 치면 뮤지컬을 홍보하는 영상 중 소설가 김영하가 나오는 영상이 있다. 이 영상에서 김영하가 말하듯, 주인공 알론조 키하나는 자신이 기사라고 "선언" 하는 인물이다. 일단 거기에서부터 고전소설과 다르고, 현대소설에 더 가깝다. 기사는 직업이자 신분일진대, 신분이 전부였던 중세시대에 이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의 "선언"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신의 뜻대로 살았던 중세 시절에, 나(인간)의 의지와 열정이 현실을 모두 이겨낼 수 있다는 선언은 지나치게 전위적이고 인본주의적인 것이 아닐까. 17세기에 이토록 도발적인 내용을 소설로 쓰기 위해서 주인공은 미치광이가 아니면 안 되었을 것이다. (소설 돈키호테는 세계 최초의 근대 소설이라는 평을 얻었다)


 기사가 되려면 일단 걸맞은 신분과 능력이 있어야 할 텐데, 주인공은 하급 귀족에 불과하고, 50살이 넘은 노인이다. 그런데도 기사 소설을 너무나 많이 읽은 나머지 자신이 기사라고 믿고, 기사라고 자부하며, 기사다운 행동으로 세상의 악인을 물리치려 한다. 지나치게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인 행동은 반대로 현실을 비틀고 깨부순다. 미치광이 노인이 누구보다 더 도덕적이고, 고결한 성품을 가지고 정의를 추구하는 모습은 그를 비웃던 주변인들, 나아가 관객까지 숙연하게 만든다. 현실을 비판하고, 풍자하고, 넘어서기에는 이보다 좋은 소재가 없다.  


 코로나 19로 모두가 힘든 시기,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공연을 계속하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관객도 많이 받을 수 없는 이런 때에 공연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소설가 김영하가 말했듯이, 우리는 일상이 감옥이 되어 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스스로를 타인과 거리두기 하며 나만의 감옥에서 고통받는 현실에서, 이 뮤지컬이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지금 당장에 우리가 처한 이 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희망을 갖고 꿈은 꿀 수 있다. 그리고 그 꿈은 언젠가 현실이 된다.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 삽화.


매거진의 이전글 두 번 보아야 완성되는 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