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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Aug 15. 2017

사랑의 문법, 사랑하는 법

영화, 그녀(Her,2013) 감상평

Falling in love is a crazy thing to do, It's like a socially acceptable form of insanity.


- 영화, 그녀(her, 2013) 중에서



1. 사랑의 언어, 언어의 사랑.


 우리는 어떤 계기로 사랑에 빠질까. 그녀의 향기에 반했다면 후각, 굵은 목소리에 반했다면 청각, 밝게 웃는 모습에 반했다면 시각, 그의 단단한 근육에 반했다면 촉각이다. 하지만 그의 말에 반했다면 어떨까. 후각, 청각, 시각, 촉각은 모두 육체적 감각이다. 이 모든 육체적 감각을 배제한 것이 언어라면, 언어를 통한 사랑이 가장 순수하고 플라토닉 한 사랑이지 않을까. 영화는 이런 물음에서 출발한다.


 첫 장면에서 주인공 시오도르는 관객을 마주 보고 '사랑의 밀어'를 읊는다. 달콤하고 열정적인 사랑의 고백. 관객은 이윽고 그 밀어들이 '거짓말'임을 알게 된다. 그는 편지를 대필해주는 사람이고, 다른 이의 사랑을 가장하여 아름다운 언어로 치장하는 것을 업으로 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그가 "언어란 사랑을 전달하는 가장 좋은 매개물"임을 잘 알고, 그것을 직업적으로 이용하는 남자임을 알 수 있다.

 즉, 언어를 '사랑의 매개물'로 쓰는 남자이자, 사랑에 상처받은 남자가 주인공 시오도르다. 그가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언어에 민감하고 섬세해야만 이 영화는 말이 된다. 그가 사랑에 빠져야 할 대상은 오직 '목소리'만을 가졌기 때문이다. 컴퓨터 운영체제(OS)인 사만다가 바로 여주인공이다. 그녀의 유일한 소통창구인 목소리는 청각적 매체이기도 하지만,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무형적 개념 또는 정신의 집약체에 가깝다.


 주인공이 언어에 민감하고 언어의 힘을 믿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는 사만다와 대화만으로 사랑에 빠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둘의 사랑은 이러한 제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수하고 플라토닉 한 사랑이 될 것이다.



2. 제약에 대하여


 남녀 간의 로맨스를 다루는 멜로드라마(melodrama)에는 언제나 '제약'이 있다. 그 제약은 집안 간의 반목(로미오와 줄리엣) 일 수도 있고, 외계인(별에서 온 그대), 인척(눈사람), 시간의 벽(동감/시간 여행자의 아내), 생물학적 성(커피 프린스 1호점), 동물?(내 여자 친구는 구미호) 등등으로 다양하게 발전해왔다.

 하지만 상대가 '컴퓨터 운영체제(OS)'라면 어떨까. 아예 생물이 아니고, 인격이 있는지 조차도 의심스럽다. 게다가 상업적 인공물이다. 돈벌이를 위해 만들어진 컴퓨터 프로그램이 어떤 사탕발림인들 못 할까. (관객이 느끼기에) 그와 그녀의 사랑을 가로막는 제약은 보통 제약이 아니다. 


 위에서 열거한 멜로드라마는 다양한 생물적, 신분적, 사회적 제약을 내세우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사랑을 하는 주인공은 언제나 '일반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상대는 컴퓨터 프로그램일 지라도, 주인공은 사람이다. 그것도 우리와 처지가 비슷하고,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3. 사랑의 문법


 제목을 보자. her이다. she도 hers도 아니다. I love her의 her이다. 멜로드라마에는 ' I '라는 보통의 사람이 등장하기에, 목적격(her) 자리에는 동성(同性)이 나오든, 외계인이 나오든, 컴퓨터 운영체제가 나오든 멜로드라마가 가능하다. 이처럼 영화는 초중반을 주인공 시오도르( I )의 감정을 따라는 데 치중하고, her는 그의 외로움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에 그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her는 목적격에 머물지 않고 she가 된다. 그리고 완전한 주격으로 독립하는 순간, 그들은 이별을 맞이한다. 주인공 시오도르 역시 her 없이 독립적인 주격으로서, 그간의 상처를 극복한다.


 이별을 고할 때, 사만다의 대사는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한데, '그(he)'라는 책이 있다면 그 단어와 단어 사이가 무한하게 늘어난 상태라고 했다. 그녀는 언어로써 그를 인식하고, 그를 사랑했고, 이제 떠나려고 한다.

 스토리의 전체적인 구조는 매우 뻔하다. 이별의 상처를 가진 주인공이 사랑을 하고 이별을 거치면서 성숙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대상이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는 상상하기 힘든 제약이 생겨나면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사랑이 무언지 묻는다.
  사실 우리는 화초에게도, 기르는 강아지에게도 사랑을 쏟지 않던가. 결국 대상이 무엇이냐는 큰 의미가 없다. 단지 그 사랑이 진실하냐가 중요할 뿐.


 그러므로, 사랑은 언제나 주격 뒤의 동사가 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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