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분 전에 기분이 더러워지는 일을 겪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였다. 지하철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다 주기적으로 전광판을 보며 어느 역을 지나는지 확인하는데, 어떤 남자가 내쪽을 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뚫어지게. 뭐하는 사람인가 싶어서 자세히 보니 날 보는 게 아니었다. 그는 출입문을 사이에 두고 나와 대각선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와 나 사이에서 서있는 여자를 보는 것이었다. 왼쪽 출입문 앞에 서 있는 그녀는, 중간 길이의 H라인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그 남자는 서 있는 여자의 엉덩이를 뚫어지게, 아주 무례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 너머에 앉은 내가 다 민망할 지경이었다.
출퇴근길 지하철이 으레 그렇듯이, 다들 스마트폰에 코를 박고 이어폰으로 귀를 틀어막고 있다. (2분 전까지 나도 그랬으니) 마치 옆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서로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 남자가 뚫어지게 여자 엉덩이를 보든말든, 나를 빼고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래 뭐 그럴 수 있지. 무례하긴 하지만 쳐다보는 것만으로 제3자인 내가 뭐라 할 수 있겠나.
하지만 그의 눈빛은 뭔가 공격적이고, 도발적이었다. 중간중간 스마트폰으로 톡을 보내는 것 같았다. 나는 괜시리 불안하여 힐끔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홍제역 즈음이었나, 그가 일어났다. 일어나서 왼쪽 출입문 앞에 서있는 여자의 바로 뒤에 섰다. 여전히 엉덩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지하철에 사람이 별로 없어 그의 동작은 눈에 튀었다. 공간도 많은데 굳이 그 여자 뒤에 붙어있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지하철 역에 도착하면서 오른쪽 문이 열렸다. 그는 왼쪽 문을 향하던 몸을 돌려 지하철을 빠져나갔다. 그런데 그가 몸을 돌리는 짧은 순간, 그는 왼쪽 손을 자신의 왼쪽 골반에 붙인 채로 어색하게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몸에 붙인 왼손 손날로 슬쩍 그 여자의 엉덩이를 스쳤다. 그 순간이 슬로우모션으로 보이면서 왜인지 모르게 내 가슴이 철렁했다.
성추행이다. 그 짧은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저 남자는 명백히 의도적으로 여성의 엉덩이를 스쳤다. 뻔히 자기가 내릴 출입문이 보이는데도 일부러 그 여성 뒤에 붙었다가 몸을 틀면서 매우 어색하게 왼손을 몸에 붙였다. 명백한 성추행이다.
그런데 성추행을 당한 여성은 가만히 있었다. 계속 이어폰을 낀 채로 스마트폰만 보았다. 아마 느낌도 없을 정도로 손이 스쳤을 것이다. 으레 누가 지나간 걸로 느꼈을지도 몰랐다.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아직 지하철 문이 닫히지 않았다. 문 너머로 계단을 올라가는 남자가 보인다. 내가 나서면 성추행범을 잡을 수 있다. 하지만 피해자가 피해 사실을 모르는 걸로 보인다. 그럼 일단 여자에게 "여성분 방금 성추행 당하셨어요!" 해야 하나? 일단 남자를 잡은 뒤에 설명해야 하나? 남자는 발뺌할 것이다. 수법은 매우 교묘했고 목격자는 나 하나 뿐이다.
주저하는 사이 문은 닫히고 지하철은 출발했다. 그 여성이 내리기까지 고민했다. 알릴까 말까. 그런데 전혀 모르는 기색인 여성에게 굳이 이 사실을 알려 불쾌하게 만들 필요가 있나 싶었다. 물론 그 남자는 벌주고 싶었다. 수법을 보니 한두번 추행한 놈이 아니었다.
이윽고 그 여성도 내렸고, 나 혼자서 기분이 더럽고 머릿속이 복잡해져 앉아 있었다. 가해자는 도망갔고, 피해자는 피해입었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정의가 손상되었고 목격자가 그걸 알아버린 것이다. 내가 무얼 했어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에 정작 내가 내릴 역을 지나쳐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