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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Aug 21. 2016

고수

검도 20년 차, 여 사범님 이야기.

 어느덧 검도에 다닌 지 5개월이 되었다.

 
 처음에는 변시 발표를 한 달 반 앞두고, 뭐라도 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서 시작한 운동이었다. 이렇게 오래 하게 될 줄 몰랐다.
 검도장에 처음 가면 기본자세 한 가지를 3개월 동안 연습하는데, 그 단순하고 반복적인 동작이 오히려 나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팔의 각도와, 다리의 움직임과, 발바닥과 지면이 닿는 부분만을 신경 쓰면 될 뿐, 변호사 시험 같은 것은 잊어도 되었다. 맨몸으로 검도장에 가서, 모든 속세(?)의 옷을 던져버리고 검도복과 죽도만이 남는다. 발도 맨발이다. 그 단순함이 좋았다.
 이 같은 검도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검도장 '사람'들이 나를 계속 검도장에 가게 만들었다. 
대부분은 40대, 50대이고, 60대 이상도 있다. 도장에서는 내가 유일한 20대(아슬아슬하게)다. 아니면 10대다.
특이하게,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다. 일단 사범님 세분 모두 40대 여성이다. 편의상 수련기간 순으로 A, B, C로 칭한다.


  

 A 사범님은 세분 중 가장 키가 크고 체격이 좋다. 도장 전반을 책임지며, 대부분의 수련자들을 가르치고, 신입 수련자의 교육을 맡는다. 처음 도장에 왔을 때 가장 살갑게 대해준 분이다.
B 사범님은 세 달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이야기를 해보았다. 그러고도 한 달이 더 지나서야 처음으로 지도를 받았다. 수줍음이 많고 낯을 가리신다. 그런데 호구(검도할 때 입는, 갑옷 같은 보호구)를 쓰면 목소리부터 달라진다. 우렁찬 발성으로, 카리스마가 넘친다. 나는 그 앞에서 덜덜 떨면서 하라는 대로 하기 바쁘다.
C 사범님은 세분 중 가장 작고 쇼트커트을 하셨다. 처음 보고 눈이 또랑또랑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처음 2주간은 나에게 눈길도 주지 않으셨다. 아마 몇 주만 하다 그만두는 수련자들이 많아서가 아닐까. 3주가 지나자 조금씩 다가와서 'XX 씨 그게 아니고요' 하면서 가르쳐 주셨다.


 세 달 후 호구를 쓰기 시작하면서, 죽도로 사람을 치는 연습을 처음으로 했다. 처음에는 상대가 아플까 봐 살살 쳤다가 혼나고, 그래도 살살 쳤다가, 사범님 및 관장님한테 올바른 동작을 보라면서 몇 대 맞은 뒤에는 (열 받아서) 나도 힘을 주어 치기 시작한다. 상대는 호구를 썼고, 죽도로 치면 별로 안 아프다고는 하지만 사람을 치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적어도 나 같은 새가슴에게는.


 사실은 이 일화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손목 치기를 배우는데, C 사범님의 손목을 치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자꾸 손목 치는 데에 주저하자, C 사범님이 지나가듯 말했다. 
'XX 씨 지금 아니면 내 손목 못 쳐요.'
헐 심쿵... 이게 바로 세간에서 말하는 '걸 크러쉬'인가. 남녀를 떠나서 나보다 월등히 실력이 높은 고수가 하는 저 호언장담이 객관적으로 맞는 말이라서 너무 멋있었다. 나도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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