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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Aug 11. 2019

문제는 역사왜곡이 아니다

영화 나랏말싸미(The King's Letters , 2019) 감상평

 조철현 감독의 영화 '나랏말싸미'는 역사왜곡 논란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훈민정음을 세종대왕님(이하 세종)이 아닌 어느 스님(신미)이 주도해서 만들었다는 영화적 상상력이 많은 관객들을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다. (8월 초) 이 영화를 본 관객수는 95만명으로 손익분기점인 350명에 한참 못 미친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니 역사왜곡은 문제가 아니었다.

세종과 소헌왕후

  '나랏말싸미'에서 세종은 한글 창제 '프로젝트'의 기획자이자 총책임자다. 신미 스님(이하 신미)은 실무자, 중간관리자다. 하지만 영화에서 한글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싸매는 것도 신미고, 세종은 글자 한번 쓰지 않으며 실무적인 일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산스크리트어를 비롯한 동서고금의 글자를 모으는 일에서부터 초성, 중성, 종성의 합자 아이디어도 모두 신미를 비롯한 스님들의 발상에서 나온다. 역사학자와 관객들이 보기에는 불편할 수 있다. 세종이 '혼자서' 한글을 창제한 것은 다양한 역사학자와 사료로써 인정받은 역사적 사실인데, 굳이 세종의 업적을 깎아내릴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일단 공식적인 기록부터가 그렇다. 믿을 수 없겠지만, 세종이 혼자서 만들었다. 이렇게 체계적이고 과학적이며 철학적인 글자를 세종이 혼자 만들었다니. 물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법, 세종이 아무리 천재라 해도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는 없다. 기존에 존재하던 여러 글자들을 참고해서 만들었을 것이다. 한 나라의 왕인데, 할 일(國事)도 많은데, 방대한 데이터를 혼자서 수집하고 정리할 시간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수족처럼 부리던 자들이 나서서 번거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들을 처리해주었을 것이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래서 세종이 가족들이 나서서 도와주었으리라 추정한다. 영화에서도 세자 문종,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이 음과 양으로 돕는 것으로 나온다)


왼쪽이 학조, 가운데가 신미 스님이다.

 그렇게 세종을 돕던 무리들 중에, 스님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스님들은 산스크리트어를 비롯한 다양한 문자를 배운다. 스님들은 활자와 인쇄의 전문가였다. 고려시대부터 사찰은 인쇄소 역할을 했다. (팔만대장경은 말할 필요도 없고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인쇄물인 '직지심체요절'도 고려시대 작은 절에서 인쇄한 책이었다)


 이렇듯 '나랏말싸미'의 영화적 상상력은 충분히 그럴싸한 것이었고, 누구나 의심할만한 지점에서 출발했다. 정말 세종이 이걸 다 만들었을까,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세종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한글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의 위대함이 바래지진 않는다. 평민들도 글자를 쉬이 읽고 쓸 수 있도록 새로운 글자를 만들겠다는 '발상'자체가 위대한 것이다. 한 명의 사람이 기획하여 글자를 만든 예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한글’밖에 없었다.

 

 세종은 왜 이런 발상을 했을까. '애민정신' 하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세종은 조선 건국 5년 뒤에 태어났다. 세종이 즉위한 때 조선은 생긴 지 26년이 갓 지난 나라였다. 고려를 잊지 못하는 백성들이 많았다. 역성혁명으로 탄생한 신생국가의 왕으로서 언제든 나라가 다시 뒤집힐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 글자를 만들려 하십니까'라는 신미의 물음에 세종(송강호 분)은 한마디로 말한다 '나라 망하지 않으려고'


 '나랏말싸미'의 영화적 상상력은 충분히 괜찮았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연출이 부족했다. 한마디로 재미가 없다.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고, 인물 간의 갈등도 개연성이 없어 보여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한글 창제 원리인 '천지인'에 맞추어 세종, 신미, 소헌왕후를 보여주고 이들의 갈등과 화합을 보여주려 한 것처럼 보이나, 관객들이 느끼기엔 어느 것 하나 설득력이 없었다. 송강호는 대가의 솜씨답게 준수한 연기를 펼쳤으나 특별히 와 닿지 않았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부족함이 없었는데도, 이야기가 힘이 없으니 영화가 지루하다.


뒤통수가 예쁜 신미 스님.

 '나랏말싸미'에서 유일하게 칭찬받을 점은 박해일의 연기와 ‘비주얼’이다. 그는 삭발이 너무나 잘 어울려서 진짜 스님처럼 보인다. 어딘가 범접하지 못할 위엄과 당찬 기개를 가진 스님. 눈을 내리깔 때 속세에 미련이 없는 듯한 박해일의 눈매와 파르라니 깎은 뒤통수가 스님 그 자체였다.


 한국 관객은 그정도로 유치하지 않다. 한글을 세종이 아닌 신미가 만들어서 흥행이 안 된 것이 아니다. 이야기에 재미도 의미도 없어 관객이 찾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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