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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Aug 15. 2019

 '밀양'과 '누구나 아는 비밀' 사이

'누구나 아는 비밀(Everybody Knows, 2018)' 감상평

*이 글의 중간부터 스포일러 있음(표시)


 나이를 먹을수록 죄를 지을 기회가 많아진다. 인생의 모든 기회가 무작위로 주어진다면, 오래 살 수록 죄을 지을 기회도 늘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어떻게든 도덕적 인간으로 살고 싶지만, 매번 선택의 기로에 서서 고민하고, 때로는 도덕적 인간이 되는 데에 실패한다(이든 콜린즈워스, 『예의 바른 나쁜 인간』, 한빛비즈). 이와 같은 고민을 하는 영화가 있다.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 '누구나 아는 비밀(Todos lo saben , Everybody Knows , 2018)'이다.


라우라 여동생의 결혼식


 영화는 스페인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시작한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결혼식과 온 가족이 모인 흥겨운 파티. 그다음부터 벌어지는 일들은 스포일러를 피하기 위해 포털 사이트 글을 인용한다.

 "결혼식 파티를 즐기던 중 (라우라의) 16살 된 딸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거액의 몸값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받은 라우라와 그녀의 가족들, 그리고 오랜 친구이자 과거 연인이었던 파코까지 나서 딸을 찾기 위해 애쓴다. (인질극이) 가족을 잘 아는 주변인에 의해 시작됐을 거란 이야기를 들은 라우라. (중략) 지금껏 모두가 숨겨온 과거의 비밀이 서서히 드러나게 되는데.."


 영화는 라우라(페넬로페 크루즈 분)와 그의 '전남친' 파코(하비에르 바르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파코는 라우라의 딸이 납치되자 자기 일인 양 그녀를 도와준다. 마침 라우라의 남편은 아르헨티나에 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라우라의 자식이 납치되었고, 고향에 계속 살던 파코는 자기 가족 일이 아닌데도 헌신적으로 나선다.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같지 않은가? 외지에서 밀양으로 온 전도연의 아들이 납치되고, 헌신적으로 전도연 곁을 보살펴는 송강호의 이야기.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Secret Sunshine, 2007)'이다. '밀양'과 '누구나 아는 비밀'의 공통점은 뒤에서 계속 이야기하자.


이 영화는 '밀양(2007)'과 여러 가지로 공통점이 많다.


  페넬로페 크루즈의 연기도 좋았지만, 이 영화를 택한 건 순전히 하비에르 바르뎀을 위해서였다. 사이코패스 살인마(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악당(007 스카이폴), 매력남(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전신마비 환자(씨 인사이드) 등등 어느 장르의 영화에서건 관객을 실망시킨 적이 없는 하비에르 바르뎀은 이번 영화에서도 자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 가히 스페인의 안성기+송강호를 합친 정도의 국민배우라 하겠다.


하비에르 바르뎀 하나로도 이 영화는 볼 가치가 있다.


 감독이든 배우이든 우리나라에선 생소하다 보니, 별 기대 없이 극장을 찾는 관객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충분히 기대를 뛰어넘는 영화를 보게 될 것이다. 초, 중반의 짜임새는 정교하고 지루할 틈 없이 전개된다. 영화의 주요 인물은 10명 정도. 이 인물들이 각자의 스토리와 과거를 가지고 서로를 교차하며 상호작용하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뛰어나다. 막바지 반전이 나오기 전까지 후반은 다소 헐겁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영화의 엔딩에 다다라서는 많은 생각거리와 함께 여운이 남는 수작(作)이다.



*여기서부터


**스포일러


***있음



왼쪽부터 라우라, 이레네, 파코.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이레네가 납치된 벌어진 현재보다, 이레네가 태어나기 전의 과거다. 이레네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과거를 시간 순으로 배열하면 이렇다.


 라우라와 파코는 어릴 때부터 20대까지 오랜 연인 사이었지만, 결국 헤어졌다. 라우라는 알레한드로와 결혼하며 아르헨티나로 이주한다. 그런데 알레한드로는 신혼 당시부터 술에 빠져서 라우라를 소홀히 한다. 결혼 3년 차, 라우라는 가족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스페인 고향마을에 혼자 왔고, 그때 '전남친' 파코를 다시 만난다. 파코가 라우라를 공항에 데려다주면서, 그들은 '우발적'으로 성관계를 맺는다. 그때 임신한 것이 이레네다.

 그즈음 알레한드로는 알코올에 중독되어 가정을 돌보지 않는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신의 구원을 갈구한다. 마침 라우라는 파코와 바람피운 사실, 남의 아이를 임신한 사실까지 고백한다. 알레한드로는 아내의 바람을 '신의 계시'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죄를 씻을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하고, 낙태하겠다는 라우라를 설득해서 이레네를 낳는다. 술도 끊는다. 그 뒤로 16년, 영화의 현재 시점에 이레네가 납치된 것이다.



 영화의 후반, 납치범은 라우라의 조카(언니의 딸) 부부였다. 그들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라우라의 파코의 오랜 연인관계를 알았고, 이레네가 파코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심증이 있었다. 인질극을 벌이려면 부잣집 딸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파코가 자기 소유 농장이 있음을 이용해, (생부生父) 파코가 농장을 팔아 이레네의 몸값을 낼 것이라 예상하고 납치극을 벌인 것이다. '이레네는 라우라가 파코와 불륜해서 낳은 딸'이라는 비밀을, 마을 사람은 물론 알레한드로까지 알고 있었다(누구나 아는 비밀). 정작 친아버지인 파코만 모르고 있었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파코는 자신의 농장을 팔아 몸값을 지불하고 이레네를 구출한다. 이레네는 라우라 부부와 무사히 아르헨티나로 떠나고. 빈털터리에 아내까지 떠나버린 집에서, 파코는 혼자 누워 홀가분하다는 듯이 웃는다. 불륜의 죄를 뒤늦게 전재산으로 씻어낸 것이다.


파코와 그의 아내.


 영화는 죄를 지으면 죄책감이 생기고, 죄책감이 생기면 어떻게든 죄책감을 씻기 위해 속죄의 행동을 하는 과정을 바통 터치하듯 보여준다. 죄 지음과 속죄의 과정을 간단히 보면 이렇다. 알레한드로는 알코올 중독에 빠지고(죄 1), 이는 라우라와 파코의 불륜(죄 2)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이레네의 임신으로 이어졌다. 알레한드로는 이레네를 낳아 키우자고 하고(속죄 1), 이레네의 탄생은 라우라 조카 부부의 납치극(죄 3)으로 이어진다. 납치극에 파코는 전재산을 털어 몸값을 지불하고(속죄 2), 라우라의 형부는 영화의 엔딩에 와서야 범인이 자기 딸임을 알아챈다. 죄 3에 대한 속죄 3은 영화 바깥에 있다. 영화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 1) 죄에는 속죄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과, 2) 죄는 끊임없이 태어난다는 것이다.


 간단히 '속죄'라고 표현했지만, 속죄는 어떻게 가능할까. 이에 관한 종교적 답변은 많지만, 세속적 설명은 어느 것이든 궁색하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속죄는 '죄책감을 씻어 내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죄와 속죄,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이지 않나. 맞다, 앞서 말한 영화 '밀양'이 진지하게 묻고 있다. 죄란 무엇인가, 속죄란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에게 지은 죄를 신이 씻어낼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이 영화는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속죄를 묻지는 않는다. 죄책감을 씻어낸 얼굴의 파코를 보여줌으로써, 그저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이런 식으로 속죄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죄 지음과 속죄의 끊임없는 연결고리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삶에서 죄를 짓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또 지은 죄를 씻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본 관객은, 극장을 나서며 스스로에게 죄와 속죄를 묻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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