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묵직함과 터질 거 같은 심장. 안 멀어보이는 25미터가 왜 이리 긴 것인지... ...
"대시를 할 때 힘이 들어도 끝까지 발차기를 해줘야 체력이 올라옵니다."
물 속에서 이를 악물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주어진 미션을 겨우 겨우 완료한다.
아침에 일어나기는 힘들었지만, 수영을 힘들게 하고 나면 밀려오는 뿌듯함이 더 크다.
다리는 터질 것 같고 샤워를 해도 땀은 멈추지 않고 몸은 피곤하지만, 그런 내가 기특하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방학이라 고향집에 내려가 시간을 보냈다. 과외를 우선 구하고 여름동안 무얼할까 생각해봤다. '운동을 하자. 아주 열심히.'가 결론이었다. (돌이켜보니 지금과 똑같네) 아침 6시에 수영반을 등록했다. 그 곳에서 그 해 여름방학을 뜨겁게 만들어준 친구 B를 만났다. 중학교 때부터 친구인 B와는 남자중학교에서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이었을 영어 말하기 대회로 이어진 사이였다.
영어말하기 대회는 3~4명 한 조를 이뤄 영어로 대본을 짜고 연극처럼 그걸 무대에서 펼치는 그런 대회였다. 중학생 남자들이 무슨 표현력이 있을까? 당연히 여자 아이들이 초강세였다. 하지만 B와 나는 어려서부터 윤선* 영어교실로 다져진 영어실력(?)이 있었다. 특히 B의 영어 발음은 정말 좋았다. 그런 B와 조를 이뤄 우리는 학교의 자율학습과 무서운 주임선생님의 호통이 없었던 '도서관'에서 영어선생님과 말하기 대회를 준비했고 처음으로 2등을 차지했다. 그 때 경험 이후로 영어에 자신감이 생긴 거 같기도 하고, 당시 B는 "우리 이왕 하는 거 미친듯이 한 번 해보자."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여튼... B랑 같이 수영을 마치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 B가 물었다. "엠제이, 저녁에는 뭐해?"
"음. 낮에는 과외다니고, 저녁 때는 그냥 집에서 쉬거나 한다. 왜? 동네에서 맥주 한 잔 할까?"
"아..엠제이, 나 저녁 때는 태권도 체육관에서 알바도 하면서 개인운동도 해."
아 생각났다. B는 중학교 때부터 태권도를 정말 잘했다. 대학교 때 만났을 때 이미 4단이었고 5단을 하네 마네 했었으니 그의 태권도 경력은 거의 10년에 육박했을 것이다.
"B, 나도 그 체육관 다닐까 하는데, 고등학교 때 1단 학교에서 땄는데 제대로 운동해보고 싶어서.."
"엠제이, 너랑 같이 체육관 다니면 나는 좋지. 근데 정확한 목표가 뭐야?"
"음, 2달여의 방학기간 동안 2단을 따는 거?"
"오마이... 2달이라, 엠제이. 일단 오늘 관장님과 상담을 한 번 해보자! 안되는 건 없자나."
"음, 엠제이씨, 품새와 발차기 등 기본을 만드는데 두 달은 좀 빠듯하긴 한데..." 관장님은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나의 친구 B가 이 때 나서서 도와줬다.
"관장님, 저도 어차피 저녁 8시반 수업끝나면 개인운동도 하고 해야 하니, 엠제이를 8시반에 수업시키고, 제가 10시나 11시까지 같이 운동 한 번 해볼께요. 승단 심사 볼지 말지는 다음달에 한 번 보구요."
"그럽시다. 그럼 엠제이님, 내일부터 8시에 운동 시작합니다."
집안 옷장에 있던 고등학교 시절 받았던 도복을 검은 띠에 메고 다음날 체육관으로 향했다. 스트레칭, 발차기, 품새를 쉴새없이 한 시간동안 했다. 아파트 단지 근처라 아이들이 태반이고, 성인은 나랑 B, 그리고 어떤 연유로 1단심사를 준비하시는 타이거 형님 셋이었다. 늘 운동마치면 맥주 마시러 가자는 타이거 형님(알고 보니 교정공무원 시험준비중이셨고, 태권도 1단이 가점이 있댔나 그랬다)을 뒤로 하고, 나는 B와 나머지 공부를 했다. 그 때 B에게 배웠다. '미친듯이' 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
9시부터 때로는 10시, 때로는 11시까지 태극 8장과 고려 품새를 수십번 넘게 정자세로 연습을 하고, 취약했던 옆차기도 수도 없이 연습했다. B는 본인 운동도 했지만 개인 코치처럼 폼을 하나 하나 잡아주었다. 호기롭게 겨루기를 도전하기도 했으나, 늘 두들겨 맞는 건 나였다. 집에서도 신기해하는 눈치였다. 대학생이라 방학 때 집에 내려와서 친구들하고 술먹고 놀러만 다닐 줄 알았는데, 아침에는 수영을 밤에는 태권도를 하고 다니니 말이다. 체육관 바닥은 혼자 운동하며 흘리는 땀이 뚝뚝 떨어져 있고, 도복 상의 대신 입었던 면티를 운동 중간 중간에 짜면 물수건처럼 물이 짜졌다. 어느날인가 11시쯤 운동을 같이 마치고 나오며 B와 편의점에서 맥주 1캔을 마셨다. B가 그랬다.
"엠제이야, 너는 진짜 미친 놈인 거 같아. 나는 솔직히 니가 열심히 안 할 줄 알았거든."
"야, 니가 미친듯이 하라며..."
다행히도 관장님은 불성실(?)할 줄 알았으나 의외로 너무 열심히 열정적으로 연습한 나를 좋게 평가해주셨고, 그렇게 두 달여의 운동 끝에 방학의 끝무렵에 나는 태권도 2단이 되었다. 3단까지는 따자라고 생각했던 마음은 바쁨과 학업과 군대생활 등등으로 인해 잊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 두 달 여의 기간동안 진짜 미친듯이 운동했던 그 뜨거웠던 여름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뜨거운 여름, 파리 올림픽이 한창이다. 유도 혼성단체전 동메달 결정전에서... 맏형 안바울의 투혼이 정말 이게 올림픽 정신이구나 싶었다. 체급경기인 유도에서 본인보다 한 체급 위 선수와 힘과 체구에서 모두 밀리지만 사력을 다해 싸우는 그 모습. 그리고 경기가 끝난 밤에 통증이 심해 진통제까지 맞았다고 한다. 카메라를 통해 전해지는 그의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얼굴에는 '패배'에 대한 생각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미친듯이' 열심히 살고 있는 걸까? 고작 수영장 발차기에 지친 기색을 보일 수는 없다. 20대 초반의 '미친듯한' 마음으로 보내야한다. 무얼 위해 그렇게 미친듯이 살거냐 묻는다면... ...
당연히 가족이다. 가족들의 풍요롭고 여유있는 삶. 금수저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삶을 영위하게 해주는 그런 부모의 모습을 꿈꾼다. 돈을 쫓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많아서 나쁠 것은 없지 않은가?
PS. 월요일 회색코뿔소의 등장과 같은 주식시장 폭락에... 의연히 매수 버튼을 누르며 '미친듯이' 버텨보자를 외치고 있는 스스로를 한 번 위로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