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낡은 서랍속의 바다를 기억하며
생각해보면 이 낡은 구두 외에도 신발장엔 구두들이 많다. 회사원의 짬밥과 같다고나 할까, 직장생활의 기간만큼, 어떤 구두는 직구를 하기도 하고, 해외연수를 가서 사기도 하고, 아울렛에 가서 편해보여서 사기도 하고... 그런데 이상하게 정작 제일 많이 신게되는 것은 바로 이 구두이다. 재작년 가을, 갈색 구두를 새로 바꾸고 싶어, 고르고 골라 비슷한 디자인의 구두를 하나 샀는데, 이상하게도 발이 너무 편하지 않아서 이 신참은 사무실 한 자리에서 잘 닦여있는 벤치멤버로 출전만을 기다리고 있다.
낡은 이 구두를 신은지 5년쯤 되었을 때, 뒷굽이 너무 닳고 먼가 구두가 낡은 거 같아 새로 살까 하다가 우연히 집근처의 구두 수선가게를 찾아갔다. 가난 때문에 젊어서부터 구두기술을 배우시고 10여년전에 구두 수선가게를 이 자리에 열고 계속 구두를 만지고 있다는 사장님께서는 "이렇게 부드럽고 좋은 가죽으로 만든 구두는 10년, 20년 신어도 관리만 잘하면 아무 문제없어."라며 뒷굽을 갈고 비브람 깔창을 솜씨좋게 해주셨다.
그 때부터였던 거 같다. 잘 안 들여다보던 이 구두를 찬찬히 들여다 본 것이. 영양크림도 듬뿍 발라주고, 가죽이 숨쉴 수 있게 요일도 맞춰서 신고, 비오는 날 젖을까 안 신고... ... 새 걸로 바꾸기만 하는 게 능사는 아닌 거 같다. 새 거라도 발에 맞지 않으면 안 신게 되고, 낡았더라도 발에 편하면 계속 신기 때문이다.
문득 나와 내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얄쌍하고 이쁜 자동 커피 그라인더가 있지만, 여전히 커피가루가 묻은 핸드그란인더로 내린 커피가 더 맛이 있고, 깔쌈한 디자인의 기능성 텀블러보다 몇 년을 같이 한 머그잔이 먼가 더 애정스럽다.
회사에서 아직까지 버티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낡은 구두처럼 편하고, 핸드그라인더 커피처럼 부드럽고 익숙하며, 머그잔처럼 늘 그 자리에 같이 있는 것 말이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경제적 자유를 달성해서 스스로 회사를 나가거나, 혹은 운좋게 정년 퇴직을 할 때에도 아름답게 이 낡은 구두를 정성스레 닦고 편한 발걸음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