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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유니버스 Nov 02. 2021

노안이 오면...

크고 중요한 걸 먼저, 디테일은 뒤따르는 것

깨알같은 숫자들과 그 조합, 각종 비율들이 Report 여기저기 숨어 '나 좀 봐주세요.' 라고 한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숫자와 비율은 없다. 파트원들과 회의실에 둘러 앉아 노트북을 연결하고, 그 속의 엑셀과 각종 숫자들을 하나씩 비교도 하고 분석도 한다. 두 세번 정도 그 과정을 거치면, Report 속의 숫자들은 이제 카트라이더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자동차와 같이 생동감 있고, 모든 것들은 '태초의 결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마치 살인현장의 흔적과 파편들이 모두 범인을 가리키고 있다는 명탐정 코난의 대사처럼 말이다.


자신만만하게 보스에게 연락을 하고, Report를 잘 정리하여 그의 방 문을 조심스레 두드린다. '흠. A부터 설명해서 C, D, H, 그리고 Z까지 이어지는 흐름을 부드럽고 정확하게 전달하자.' 라는 나의 두근거림은 보스가 안경을 벗는 순간 여지없이 깨진다.

"엠제이, 글자와 숫자가 좀 작네. 내가 노안이 와서 잘 안 보여. 그래서 내가 뭘 봐야 하니? 핵심이 뭔가?"


'앗, 이게 아닌데. 안돼요 보스. 우리는 지금 Tower Bridge를 건너, Tower of London으로 이어지는 Themes River 둑방길을 걸으며 시원한 강바람의 냄새를 같이 맡고, G.C office에서 무단횡단으로 자전거와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같이 눈치를 보며 건너고 그 두번째 오른쪽 골목으로 쭉 올라가 조금은 어두운 골목 끝에 있는 Llody's of London 에서 근무하는 정장을 빼입은 수많은 런더너 사이를 역시나 같이 비집고 들어가며 골목 왼쪽에 있는 지하 건물의 Bolton에서 굉장히 이탈리아스러운 웨이터의 요란하고 화려한 이탈리아식 영어 서빙을 받으며 이번에도 역시나 같이 누가 영국의 요리가 맛없다고 했어 라는 드립을 날리며 랍스터 파스타를 매우 흡족스럽게 함께 먹어야 하는데...... 그런데,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하고, Bolton 랍스터 파스타는 왜 맛있냐고 한마디로 묻다니'


나와 파트원들이 분석하고 고민하고 느꼈던 수많은 고민들은 '핵심'의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목적지로 가는 우아한 경로를 그리고 강물 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백조처럼 그 경로를 하나씩 밟아가 마침내 함께 목적지에 도착하는 그런 아름다운 연역적인 그림을 그렸던 것 같다. 그 경로 속에서 마치 방탈출 게임을 하며 자물쇠 하나 하나를 증거들을 찾아서 풀어가는 것 같은 그런 희열을 나도 보스도, 그리고 우리도 함께 하길 기대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점점 바빠지고 관여하는 일들이 많아지고 보니 안경을 벗었던 보스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된다. 굳이 노안이 핑계가 아니라, 노안이 올 만큼 경력과 연륜이 쌓이고, 각종 위원회에 의사결정자로 참여하게 되면 흩어진 퍼즐들을 모아 완성하는 연역적인 추리와 사고의 희열보다는, 결론이 맨 앞에 나오는, 그래서 다소 무미건조하지만 반면에 직관적인 그런 방식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얘기하는 핵심이란, 안경을 벗고도 보이고 이해할 수 있는 '핵심적인 결론', 또는 또 다른 보스들 또는 궁금해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강력한 설득력이 있는 결론' 이라는 것을.


아직은 노안이 오지 않았으니, "아빠, 오늘 너무 너무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한 번 들어보실래요?" 라는 아이들과 "엠제이, 이거 정말 대박이예요. 한 번 봐볼래요?" 라는 파트원들의 연역적인 말들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야 하겠으나, '본질을 꿰뚫는 핵심'을 늘 잊지 말자. 꼭 노안이 곧 찾아올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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