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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제이유니버스 Jan 05. 2022

다이어리란 무엇인가?

꾸욱 눌러쓰던 그때를 기억하며

새해 첫 사무실 출근을 하며 갑자기 '다이어리'가 사고 싶어졌다. 메모나 회의를 할 수 있는 노트 겸 다이어리는 회사에서 지급될뿐더러, 페이퍼리스 시대에 맞게 작은 태블릿 PC도 책상에 있다. 심지어 나는 매일 일기를 써서 노란 일기장도 가방이나 책상에 늘 놓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어리'가 사고 싶어졌다.


점심을 매우 퀵하게 먹고, 교보문고에 들렀다. 이미 새해가 지나서일까? 형형색색의 다이어리들은 20%요, 30%요라고 할인 스티커를 붙이고 있었다.


'점심 먹고 30분 정도면 찬찬히 둘러보고 구매할 수 있겠지.'


라는 나의 생각이 오만방자함이라는 것이 곧 드러났다. 주간 계획표가 잘 짜인 다이어리는 매일의 작성 칸이 너무 부족했고, 스케쥴링에 좋은 다이어리는 메모장이 너무 부족했다. 그렇다고 날짜만 덩그렇게 매일 나와있는 저널을 사자니 그럴 바엔 그냥 일기장을 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못 고르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오후 내내 내가 왜 다이어리를 갑자기 갖고 싶어 졌지? 나는 다이어리에 무엇을 적으려는 걸까? 생각하고 정리해 봤다.



사실 다이어리는 고등학교 시절, 지지리도 물리랑 수학 공부하기가 싫어서 매일 특정 시간에 그 두 과목을 공부하려 적다 보니, 어느새 일종의 고시생 수첩처럼 오전 8시 무렵부터 집에 가는 밤 12시까지 빼곡히 뭔가 그날 공부할 내용들을 적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To-Do List를 잔뜩 적어놓고 집에 돌아가기 전에 모두 '체크' 되어 있는 것을 보는 뿌듯함이란 놀게 없는 고3 에게는 작은 놀이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신나게 놀고먹고 운동하느라 그런 생각조차도 없었다. 그러다 장교로 군생활을 하게 되며 프랭클린 플래너를 만나게 되었다. 지옥에서 온 저승사자, 악마 등등 형용할 수 있는 모든 무서움을 갖다 붙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았던 모 대장. 그는 A4 용지 사이즈의 대형 프랭클린 플래너를 늘 옆에 끼고 다니고, 책상 위에 펼쳐두고 있었다. 반복되는 군대의 회의 시간에 누군가가 한 이야기, 자기가 한 이야기를 빼곡히 적는 것은 물론이고..


"엠제이, 1달 전 00 회의에서 이거 하기로 한 거 어떻게 됐어? 넌 내가 안 챙기면 안 할 거야?"


라는 디테일한 그의 호통에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렇게 몇 개월 탈곡 생활을 하다가 외박을 나와, 그때도 교보문고에서, 프랭클린 플래너를 샀다.


'당하나 보자, 이 저승사자야.'


라는 당돌함으로 하루를, 한 주를,  또 한 달을 계획하고 기록하고 실행하고 버티었다.

검은 바인더와 펜을 늘 들고 다니고 뭔가를 적고, 메모하고, 지웠다 다시 적고 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2개월 2주 전, 00 훈련에서 000으로부터 지적받았던 내용은 0 였는데, 000 처리했습니다."


라는 식의 디테일한 답변과 기록 덕에 꼼꼼함 대마왕도 그 뒤로는 엠제이에 호통치는 일이 줄어들었다.

(물론 다른 일들로 무지하게... 혼난 적이 더 많지만 ㅠ)



그러다 회사를 입사하고, 어제가 오늘 같은 반복적인 일상 때문일까? 다이어리는, 플래너는 슬그머니 새해 위시리스트에서 빠졌고, 그 자리를 작은 일기장이 채워갔다. 정말 별 쓸데없는 것들이 기록된 나의 일기장. 누구랑 어디서 밥을 먹었고, 커피는 어디가 맛있으며, 지하철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보스는 어떻다 등등 몇 년 전 일기장을 보면 기억도 나지 않지만 시트콤을 보는 재미가 있다. 시간을 이렇게 보냈구나 하는 그런 재미


그래서 올해는 그런 삶을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건 아닌데, 다이어리가 사고 싶어졌다. 글씨도 장교 시절처럼 정성스럽게 꾸욱 눌러쓰고, 해야 할 일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하나씩 생겨가고 있는 루틴들이 데일리로 잘 되어가고 있는지도 기록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신변잡기보다 그날의 나의 기분, 무엇이 잘되고 안되었는가를 기록해 두고 싶었다.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는 마음으로......

갈색의 영롱하고 감촉좋은 표지의 다이어리.뭔가 써달라 아우성이다


그래서 이 녀석을 거~금을 들여 구매했고, 사실은 매우 만족스럽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20대 눈이 초롱초롱하고 체력도 좋았던 장교 시절은 아니지만, 하루하루를 계획하고 앞서간다는 느낌적인 느낌. 그리고 그날의 내가 오롯하게 기록된다는 그런 느낌이 매우 좋다.


아내에게도 다이어리를 사줄까?라고 물었는데 아직까지는 답이 없다. 아마도 내가 곧 이 거대한 데일리 다이어리를 안 쓰게 될 거라는 생각 때문 아닐까? 하지만 난 한 번 한다면 하는 사람이고, 2년이 넘는 저승사자와의 동행 기간에도 놓친 적 없이 다이어리를 썼다는 사실을 그녀도 알면 좋겠다. 친한 회사 후배와 점심을 먹으며 새해 계획을 고민하고 있다길래, 다이어리부터 사라고 했다. 다시 젊어질 수 있을 거라고...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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