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엠제이유니버스 Nov 15. 2023

낯선 것의 무서움

산란한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 날의 이야기 

간만에 휴가인데 매우 바쁜 날이었다. 전날 늦게 잤지만 휴가를 잠만 자고 보낼 수 없다는 생각에 아쿠아맨 라이프 생활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깨워 유부초밥도 먹이고 짐도 챙겨서 보낸다. 일년 중 그래봤자 며칠 아이들 등교를 챙겨주는 건데, 아이들은 참 금방도 자라는 거 같다. 


오전/오후 무언가 굉장히 부산하게 보내고, 맘같아서는 침대에 누워서 낮잠을 자고 싶은 오후 5시였다. 하지만 잠옷을 갈아입는 대신 비즈니스 캐쥬얼을 주섬주섬 꺼내 입어야 했다. 런던에서 일할 때 업무파트너였던 갈매기 아닌 영국사람 조나단이 서울에 출장와서 저녁을 먹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 업무가 바뀌어 나단씨를 볼 일이 없었기에 명함을 새로 전달해줘야겠다 싶었다. 평소 사무실에는 베낭을 메고 출퇴근을 하며, 지갑은 베낭 안쪽 어딘가에 보관하고 다닌다. 스마트폰 안엔 카드부터 신분증까지 다 있기 때문이다. 


배낭없이 나가려니 꼼짝없이 지갑은 어딘가의 주머니에 넣어야 했다. 예전에는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단추를 잠그기도 했는데, 몇 년 만에 바지 뒷주머니에 넣으니 불편하기 이를 수 없었다. 결국 지갑은 외투의 안주머니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로 나가 나단씨를 만났다. 


"MJ, What a surprise. Time flies !!!! It's a great pleasure to see you in Seoul." 등등 

와인 한 잔에 영어실력이 한 웅큼씩 늘었고 4명이서 와인 4병을 퍼마시며 7년여의 시간을 업데이트했다. 그동안 연락도 자주 못했다며 바뀐 엠제이의 명함을 아주 예의바른 비즈니스 정석대로 전해주는 것도 잊지 않고... ... 




정작 문제는 다음날 오후 5시에 일어났다. 회사 직원 부모님의 상 소식이 공지되어 습관처럼 배낭 속에 지갑을 찾아 손을 뻗었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어, 이거 뭐지?' 라는 당혹감이 우선 느껴졌다. 

'아, 어제 나단씨를 만나며 외투를 입고 갔었지' 라는 생각에 다시금 안도했다. 

'오늘도 같은 외투입고 온 단벌신사인 나를 칭찬해.' 라고 하며 안주머니를 뒤지는데, 

외투의 안주머니 지퍼는 열려있고, 지갑은 없었다. 가방 안에만 소중히 넣고 다녀 구김 하나도 없는 지갑이 없어졌다. 


나단씨와 명함을 교환했던 때를 떠올려봤다. "엠제이, 너는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7년만에 보는거야?" 라는 나단씨의 말에 외투 지퍼를 내리고 지갑을 꺼내서 테이블에 올리고, 명함 한 장을 꺼내서 공손하고 다소곳하며 예의바르게 나단씨에게 건네주었다. "아, 글로벌 비즈니스를 하지 않으니 그동안 내가 널 못 봤구나. 하지만 오늘 만났으니 우리 Cheers!." 라고 했던 나단씨와 와인잔으로 건배를 하고... 건배를 하고... 지갑을...어떻게 했을까? 갑자기 식은땀이 나고 등골이 싸한 느낌이 들었다. 


'아닐거야, 엠제이. 넌 그렇게 멍청하지 않을꺼야. 남들이 지갑을 놓고 가면 그걸 알려줄 지언정 니가 니 지갑을 놓고 다닐 성격은 아니자나.' 라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싶었으나, 이미 어제 저녁먹은 식당으로 전화를 걸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결과는 어제 우리가 먹었던 그 룸의 테이블에서 발견된 지갑은 없는 것으로... ...




'그래. 지금까지 만취했어도 가방, 핸드폰 잃어버린 적 한 번 없는 나인데, 집에 있겠지.' 

'식당 테이블에도 없다는 건 외투에는 지갑을 넣었고, 지퍼를 안 잠궜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외투를 입고 돌아다니다 어디서 흘린걸까?'


습관적으로 외출시 가스레인지 밸브를 잠글 정도로 '안전과 정확성'에 강박적인 나를 믿을 것이냐, 아니면 잘 못마시는 술을 많이 마셔서 맛이 간 나의 육체를 의심할 것이냐의 순간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평소처럼 책을 읽거나 무언가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대체 이 놈의 지갑이 어디 간거야?'가 머릿속에 맴돌았기 때문이다. 


애써 불안함을 꾸욱 누르고 집에 도착했고, 이어폰, 립글로즈, 동전 등 평소 자주 쓰는 물건들을 모아놓은 서랍을 조심스레 열었는데, '엠제이, 나 찾았어? 나 여기 있었어. 어제 밤부터.' 라며 지갑이 반기고 있다. 

술을 마셨음에도 전날 가져갔던 물건들을 살포시 제자리에 챙겨 두었나 보다. 




이렇게 당연히 있을 지갑이 혹시나 없어졌을까 불안해했던 마음은 '나이듦'의 다른 의미일까? 총명함도 있고 체력도 있던 시절에는 이런 실수가 없었는데, 무언가 집중력과 기억력이 떨어져서 벌어진 일 같단 생각이 들면서 말이다. 와인을 마셨다고는 하지만, 평소에 안 들고 다니던 지갑을 부득불 겉옷에서 꺼내서 서랍에 넣었는데 그것도 기억못하다니 참 별일 아닌 별일이다. 그래도 아무일 없었다는 듯 그 자리에 그렇게 있어준 지갑에게 고맙기도 하고,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 불안해 했던 내가 하찮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이를 들어가면 오히려 담대해지고 큰 일에도 담담해져야 하는데... 기억 안 나는 지갑에 안절부절했던 소심함이 아직 어른이 덜 되었나 싶기도 하다. 익숙한 것들이 익숙한 곳에 있지 않으니 생기는 불협화음인 것 같다. 퇴근길에 안 가본 길로 한 번 걸어봐야 하나 싶다.                                                          (끝) 


#라라크루 #라이트라이팅 #1-3









매거진의 이전글 모기와의 전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