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다. 일은 연말이라 폭주하고, 덩달아 술자리도 폭주한다. 술 - 수면 - 일 일 일의 연속이다.
좋아하는 수영도 며칠째 일어나질 못해서 못 간다 ㅠ 망할 놈의 술자리와 연말 업무들... 긴 전쟁(?)탓인지 옆자리 후배들이 하나씩 쓰러진다. 독감에, 장염에, 몸살감기에... ...점심시간에 후배들은 식당에 나가는 대신 자리에서 샌드위치나 컵라면을 먹으며 모자란 잠을 채운다. 나는 해장을 한다.
독감이 무서워 올해는 일찌감치 독감주사도 맞았고, 귀찮지만 늘 지하철에서도 마스크를 끼고 다닌다 (언제 어떻게 아플지 모르기 때문에) '아 피곤해' 라는 말을 안 하려고 거울도 자주 보지 않는다. 몸살감기 기운이 있으면 늘 마시는 쌍화차도 똑 떨어져서 약국의 종합감기약이랑 테라플루도 자주 사게 된다.
체력이 딸리는 화요일이라 그런지 몸이 무겁다. 어제 달콤 따땃해서 퍼마셨던 사케가 새벽에 온 몸을 휘돌았는지 아침이 되어서도 알딸딸하다. 물 맛도 없는 걸 보니 몸이 아직은 정상이 아닌가 보다. 9시부터 빅보스와의 미팅이 있다. 일정을 뒤로 미룰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협상을 더 해볼 여지도 없다. 일방통행의 길에서 빅보스와 맞닥뜨려 그를 설득해야 한다.
몸과 마음이 모두 덜 깨어 있는 상태에서 .. 머리 속 레고블록들을 이리 붙였다 저리 붙였다 해본다.
'이걸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고, 저걸 질책하면 요렇게 대안을 전달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중에 갑자기...
스마트폰 속 메모의 글자가 흐리게 보인다. 한 쪽 눈씩 번갈아 감아보는데 글자가 흐릿하고 두 줄로도 보이기 시작한다. 고개를 들어 천장 등을 보니 유달리 눈부시다. '아, 이제 나도 형님들처럼 노안이 오는 건가?' '요새 넘 무리했더니 눈이 신호를 보내는 건가?' 했다가 불현듯 아침에 넣은 인공눈물이 생각났다.
근시에 매일 컴퓨터를 쓰는 사무직이라 눈이 늘 뻑뻑하다. 사무실 가습기로도 부족해서 하루에 서너개씩 인공눈물을 넣어줘야 한다. 아침 출근길에 인공눈물 넣는 것도 일과 중 하나이다. 잠과 술에서 덜 깬 몸뚱아리를 추스려 출근하기 전 인공눈물을 넣었다. 기억이 나는 건 인공눈물의 눈닿는 부분의 감촉이 평소 쓰는 인공눈물과 좀 다르다는 느낌뿐...
"아이들 근시 치료제예요. 인공눈물이랑 똑같이 생겼으니 넣을 때 조심하세요. 근시 치료제는 산동제 효과가 있어서 잘못 넣으면 동공이 확대돼서 눈부심이나 빛번짐이 심합니다."
라고 했던 동그란 안경의 밝은 표정의 의사선생님 말씀이 생각나는 순간. 한편으로는 어디가 아픈 게 아니라
는 안도와 함께 한편으로는 몸과 마음이 왜 이리 따로 노는가 싶었다. 근시 치료제의 산동제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아침 나절 내내 형광등 하얀 불빛이 너무 밝게 느껴져 실눈을 뜨고 아래를 쳐다보게 되었으며, 빅 보스와의 미팅에서도 고개를 들기보다는 아래로 눈을 내리깔고 마스크까지 낀 중저음으로 그를 상대했다. 빅보스와의 미팅은, 하지만, 예상대로 쉽지는 않았고 눈이 피로함보다 마음의 피곤함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해장 점심으로 정한 토마토 스튜를 먹으러 나오는 길, 술에 몸이 힘들고 빅보스와의 대전 실패로 어수선한 내 맘을 모르는지 산동제 넣은 눈에 보이는 세상은 유달리 밝기만 하다. 눈이 너무 시리고 부셔서 한참을 눈을 가리고 이동하며 머리 속에는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디' 라는 말이 맴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봤자 그저 직장인일 뿐인데 하는 생각 말이다. 며칠전 보았던 X튜브에서 "여러분, 본인의 일을 만들어서 빨리 퇴사하고 경제적 자유를 찾으세요!" 라는 말도 생각나고 하루종일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하루 종일 몸과 마음이 따로 놀더니 5시쯤 되니 밝기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창밖은 어느새 어두워지고 회사원들은 어느새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걷고 있다. 나도 그런거지 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