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와 토끼

빠른 생활사 전략과 느린 생활사 전략

by 교양이


생활사 이론



앞 장에서 보수주의자가 진보주의가 진화하게 된 환경이 있다고 했다. 보수와 진보는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나뉘었다. 그 환경적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생활사 이론이라는 것을 우선 소개한다. 개체는 이익과 비용을 맞거래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익이 비용을 상회하지 못하면 그 개체는 도태된다. 이러한 과정이 아주 오랫동안 통계적으로 축적되어 일어나는 게 자연선택이다. 그 결과로, 개체군 내 다양한 맞거래 전략가들이 나타나게 된다. 이를 탐구하는 것이 생활사 이론이다.


생명의 진화는 유기체가 환경으로부터 얻은 자원을 에너지로 이용하여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환하기 위해 경쟁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자연선택은 그 과정에서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획득하고 분배하여 자신의 포괄 적합도를 최대로 높이는 개체만을 선택한다. 포괄 적합도란 어떤 개체의 생식적 성공과 유전적 친족의 생식적 성공을 더한 것을 말한다. 개체는 한정된 에너지를 최적의 상태로 번식과 생존에 분배해야만 한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자신의 환경과 종의 특성, 짝과 경쟁자를 고려하여 최선의 전략을 세우고 실행해야 하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생활사 이론은 유기체가 다양한 적응적 과제를 해결해야 할 때,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야 가장 번식에 성공할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이론이다. 개체가 대가 없이 에너지를 무제한으로 쓸 수 있다면 에너지를 어떻게 분배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개체는 에너지와 시간을 소비해 벌어들인 한정된 에너지 예산에 맞춰 살아야 한다. 그 때문에 유한한 예산을 여러 목적으로 나눠 맞거래해야 하고, 그 대가로 무언가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포기해야만 한다. 애니 『강철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등가교환 원칙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들도 벗어날 수 없는 제1원칙인 것이다. 개체가 자신의 적합도를 늘리기 위해 에너지를 배분하는 문제, 즉 에너지 맞거래는 크게 보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현재와 미래의 맞거래, 자식의 질과 양의 맞거래, 짝짓기와 양육 노력의 맞거래가 그것이다.



현재 vs 미래 맞거래


유기체는 가용 에너지를 다양한 곳에 나눠 투자할 수 있다. 하지만 유기체의 궁극적인 목적은 번식이다. 그래서 어떤 개체는 바로 번식을 한다. 다른 개체는 생존과 성장에 에너지를 투자함으로써 나중에 더 나은 짝짓기 기회를 가질 준비를 한다. 에너지를 획득하고, 성장하고, 포식자를 회피하고, 상처를 회복하고, 미래에 에너지를 분배하면 당장 번식할 기회는 놓칠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이익이 되돌아온다. 유기체는 현재의 번식에 에너지를 투입할 것인지, 미래를 위한 관리와 성장에 에너지를 투자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장기적인 이익을 포기하고 당장의 짝짓기에만 에너지를 투자하면 그만큼 자식의 질은 떨어질 수 있고, 꼭 번식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반면 인내심을 발휘해 미래에 에너지를 투자하게 되면 이익은 복리로 불어날 수 있지만, 짝짓기에 성공하지도 못한 채 포식자에게 먹혀버릴 위험도 있다.


개체가 성장하는 데 에너지를 소비하면 미래에 자원을 확보하는 능력을 높일 수 있기에, 결과적으로 미래의 번식력은 높아진다. 그러나 현재를 관리하는 데 집중하면 신체 조직을 고치고, 에너지를 면역 기능에 분배하고, 에너지 생산에 전념할 수 있다. 개체는 현재와 미래 중 어느 쪽에 어디까지 에너지를 투입할지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그 결과로 다양한 특성을 가진 개체들이 나타나게 된다.



자식의 질 vs 양 맞거래


생활사 이론의 두 번째 요소는 어디까지 자식에게 자원을 투자할지에 관한 문제다. 즉, 자식의 질을 높이는 분배 대 자식의 양을 높이는 분배 간의 맞거래다. 번식에 투자할 부모의 자원은 한정돼 있는데, 자식을 더 낳으면 기존의 자식에게 투자하는 자원이 줄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자식의 질은 감소하게 된다. 이는 결과적으로 자식 모두의 생존율을 감소시킬 수 있다. 자식의 질과 양을 맞거래하는 문제와 관련해 더 복잡한 다세대 모델에서는 자식의 생존율과 함께 자식의 성년기 번식률도 포함시켜 경우의 수가 복잡해진다. 부모의 투자 정도에 따라 자식의 신체 크기, 건강, 기술, 지위 등의 이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짝짓기 vs양육 맞거래


생활사 이론이 더 복잡해지는 이유 한 가지가 유성생식, 즉 암수 간의 짝짓기다. 다윈은 이를 성 선택이라고 불렀다. 번식을 위해 개체는 짝이 될 상대를 찾고, 짝을 고르고, 짝에게 고름을 받아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짝짓기를 통해 번식에 성공해야 한다. 이 모든 활동은 시간이 들고, 상당한 에너지를 써야 하고(과시 행동, 신체적 특성, 동성 간의 경쟁), 포식자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짝짓기 기회를 얻기 위해 기존 자식의 번식 적합도를 포기해야 한다. 즉, 짝짓기와 양육을 맞거래해야 한다. 짝짓기-양육 맞거래는 앞선 질-양 맞거래와 겹치는 영역이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 자식의 수는 짝짓기 빈도 외에도 산란의 수, 자연 유산, 심지어 영아 살해로도 조절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체화된 자본


결과적으로 성장과 발달은 체화된 자본에 투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체화된 자본이란 미래의 번식을 위해 현재의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사고 싶은 것을 위해 저축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다. 에너지 저축은 신체에 대한 저축과 기능에 대한 저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신체적 저축은 근육, 소화기관, 뇌 등의 신체 조직에 대한 저축이다. 기능적 저축은 힘, 빠르기, 기술, 지식 같은 것들이다. 체화된 자본 관점에서 보면, 현재-미래 맞거래는 자신에 대한 투자와 번식의 맞거래이고, 질-양 맞거래는 자식의 체화된 자본에 대한 투자와 현재의 자식 간의 맞거래이다.


뇌는 체화된 자본 관점에서 독특한 성격을 지닌다. 뇌는 신체에 대한 투자이지만, 기능에 대한 투자의 산물이기도 하다. 뇌는 현재의 경험을 미래의 성과로 전환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뇌의 신경 조직을 키우고 관리하는 일은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기에, 즉시 사용한 가능한 에너지인 포도당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우리가 공부를 하거나 머리를 쓰면 배가 고파지고 쉽게 지치는 것이다. 대형 영장류, 그중에서도 인간의 큰 뇌는 미래에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진화한 셈이다. 인간이 20년 가까이 번식을 유예하며 지식과 경험을 학습하는 이유도, 언젠가 이익이 초기 비용을 상회하리라는 믿음이 있어서다.


정리하자면, 생활사 전략은 개체의 형태적, 생리적, 행동적 형질들이 상호작용한 결과물이다. 예를 들어, 어떤 동물이 지위를 높여 번식 가능성을 올리려면, 성적 수용, 경쟁의 시작, 양육을 위한 행동과 동기(보금자리 짓기, 자식 보호) 같은 것들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반면 번식을 유예하는 생활사 전략을 택한 개체는 행동 미성숙의 기간이 길어지고 번식과 관련된 행동이 나타나지 않는다. 덕분에 개체는 위험을 회피하여 성적 성숙에 이르기 전에 죽을 가능성을 최소화할 수 있다. 어느 쪽이든 현재의 모든 생명체는 나름의 생활사 전략을 잘 수립한 덕분에 진화적으로 성공한 조상의 후손인 것이다. 이는 곧 우리가 알아볼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의 전략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생활사 전략의 변수


생활사 전략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은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크게 5가지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 우선, 유기체는 생존해야 훗날 번식을 도모할 수 있다. 생존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정해진 수명, 식량 자원, 외적인 사망 위험(포식자, 사고, 전염병), 예측 가능한 환경 등이 있다. 둘째로, 개체의 성장에 관한 것이다. 개체가 성장하는 속도, 성적 성숙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성장 크기 등이 개체의 성장에 영향을 미친다. 셋째로, 개체는 관리에도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개체는 부모의 투자에 걸맞은 이익을 산출하기 위해, 다양한 생존 기술을 습득하고 신체를 관리해야 한다. 사냥 기술과 협동 능력을 배워나가고, 면역 기능을 발전시키고, 신체 조직을 수리해야 하는 것이다. 마침내 성년기로 성장한 개체는 번식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넷째로, 번식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자식의 수, 짝을 찾는데 투입하는 노력, 짝짓기 빈도 등이다. 그 결과로 개체의 번식력은 달라진다. 하지만 번식에 성공했다고 다가 아니다. 부모가 된 개체는 자식이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할 수 있도록 양육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다섯째로, 성차에 따라 투자의 양은 달라질 수 있다. 짝짓기가 끝나고 얌전히 암컷 사마귀에서 먹혀주는 수컷 사마귀처럼 극단적인 예도 있고, 독박 육아를 하는 종, 공동 육아를 하는 종, 개체별로 다른 투자를 하는 종 등 복잡한 양육 전략이 나타날 수 있다.


생명체의 생활사 전략


이렇듯 다양한 변수 덕분에 개체의 형질은 종 내에서도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으며, 형질에 따라 다양한 행동 및 심리 패턴을 가진 개체들이 출현하게 된다. 인간의 심리적 기질, 즉 성격은 생활사 전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동물도 마찬가지다. 생활사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만 특별히 다르거나 대단한 존재는 아닌 것이다.

결과적으로 개체의 생활사 전략은 여러 면에서 다양해질 수 있다. 위험을 감수하는 성향, 자기 조절 능력, 새롭고 낯선 것을 탐험하는 성향, 짝을 찾는 방식과 노력의 차이, 자식을 부양하는 방식들도 개체별로 차이가 난다. 또한 학습, 기억, 의사결정 같은 인지능력도 생활사 전략에 의해 달라질 수 있다. 이렇게 다른 생활사 전략은 곧 보수와 진보의 특성을 만들어 낸다.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에 대응되는 생활사 전략이 바로 느린 생활사 전략과 빠른 생활사 전략, r/k 선택이다.



빠른 생활사 전략 vs 느린 생활사 전략


빠른 생활사 전략을 택한 개체는 수명이 짧지만 그만큼 성장이 빠르다. 성적으로도 빨리 성숙해 이른 번식을 한다. 또 양육에 적게 투자하고, 최대한 많은 짝짓기 기회를 가진다. 질보다 양을 우선시하는 바람둥이 유형이 빠른 생활사 전략의 특징이다.


반면 느린 생활사 전략을 가진 개체는 긴 수명을 가지고 느리게 성장한다. 개체는 성적으로 느리게 성숙하며 늦게 번식에 돌입한다. 또 짝짓기 횟수를 줄이고 자식은 적게 낳고, 양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양보다 질을 우선시하고, 일편단심 순애보 유형이 느린 생활사 전략의 특징이다.



r-선택 vs k-선택


r/k 이론에서는 인구 밀도를 기준으로 r-선택과 k-선택을 나눈다. r은 개체당 증가율을 뜻한다. r-선택 개체군들은 예측 불가능하고 가변적인 환경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작은 신체적 크기, 적은 양육 투자, 많은 자식 등을 통해 양적 우위를 추구한다. 또한 부적합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분산 능력이 좋고 개체군 밀도가 낮다. r-선택을 한 개체군들은 불안정한 환경에서 변화에 잘 적응하는 생활사 전략을 가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생활사 이론에서는 이러한 유형들을 제너럴리스트라고 부르는데, 제너럴리스트들은 변화가 심한 환경과 다양한 영역에 적당히 잘 적응한다.


반면 k-선택을 한 개체군들은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환경에서 살아간다. K는 환경 수용능력을 뜻하므로, 개체수는 환경이 수용할 수 있는 최대치에 가깝게 늘어난다. r-선택이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 개체수와 인구 밀도에 초점을 맞춘 전략이라면, k-선택은 안정된 환경에서 먹이나 영양분 같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데 초점을 맞춘 전략이다. 그래서 K-전략가들은 개체의 크기가 크고, 성장 속도가 느리고, 소수의 자식을 낳고, 자식에 많은 투자를 한다. r-선택 환경에선 변화에 잘 적응하는 개체가 유리하지만, k-선택 환경에선 자원을 잘 확보하는 경쟁력이 강한 개체가 선호된다. 생활사 관점에서 보면, k-전략가들은 특정 영역에 강한 스페셜리스트들이다.



보수와 진보의 생활사 전략


보수주의는 느린 생활사 전략과 k-선택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보수주의자는 세상이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하기에 경쟁에 뒤처지지 않도록 자식을 엄격하게 키우고, 아이에게 많은 투자를 한다. 또한 보수주의자는 성적으로 보수적이라 적은 이들과 관계를 가지고,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환경을 좋아하고, 노력과 절제를 강조한다. 생활사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보수주의자는 현재-자식의 질-양육 맞거래를 택한 느린 생활사 전략가들이다.


진보주의자는 빠른 생활사 전략과 r-선택과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진보주의자에게 세상은 다양한 기회가 널려 있는 곳이기에 자식을 자유분방하게 키우며, 경쟁하기보단 적성과 자아를 찾도록 도와준다. 진보주의자는 성적으로 개방적이고, 예측할 수 없을 만큼 새롭고 다양한 경험을 하기를 좋아한다. 또 세상이 미래에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사회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진다. 생활사 이론의 관점에서 보면 미래-자식의 양-짝짓기 맞거래를 택한 빠른 생활사 전략가들이다.



인간의 생활사 전략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느린 생활사, 또는 K-선택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잡식 동물로서 고기나 식물의 뿌리, 견과처럼 영양 밀도가 높지만 얻기가 어려운 음식을 우선적으로 섭취하려 한다. 그래서 고기가 항상 맛있는 것이다. 잡식 동물의 장점은 영양과 칼로리가 높은 육식을 할 수 있고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하고 채집이 쉬운 열매, 과일, 뿌리 등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사냥은 위험하고, 힘들게 잡았다 해도 고기는 금방 상하거나 썩는다. 독이 있는 식물을 먹어 죽을 수도 있다. 잡식 동물의 딜레마는 여기서 발생한다.


독이 있는 열매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학습하는 과정, 사냥을 위한 기술과 정보를 학습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오랜 배움을 통해 숙련돼야 하고, 개인들의 폭넓은 협동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인간은 복잡한 사회를 발전시키면서 그에 걸맞게 지식과 기술, 사회적 능력 등을 학습하고 전달해야 했다. 따라서 복잡한 사회적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인간은 뇌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식으로 진화했다. 그 대가로 인간은 오랜 기간 부모에 의존하는 무력한 유아기를 거치고, 사회적 관습과 지식을 습득하는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거쳐서야 성인이 된다.


이를 체화된 자본 개념에서 보자면, 인간은 늦은 번식과 지연된 적응을 통해 큰 에너지 채무를 빚지게 된다. 유아기와 아동기를 거치며 뇌는 사회적 기술과 능력을 학습하지만, 그만큼 늦게 성장하며 부모에게 에너지 자본을 빚진다. 투자 대비 번식의 효과가 늦게 돌아오는 것이다. 뇌가 성장하느라 아동기의 취약성과 의존성은 오랫동안 지속되고, 이는 부모에게 긴 자녀 양육 비용을 부담시킨다. 하지만 부모, 그중에서도 여성만이 양육의 비용을 떠 앉을 수는 없는 셈이다. 그래서 친족과 할아버지와 할머니, 자식의 형제들이 양육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게 된다. 번식 후의 삶(폐경기)이 오래 지속되는 이유기도 하다. 산업화가 진행되기 전까지 인류의 대표적인 가족 형태는 확대가족이었다. 오늘날 선진국에선 양육에 대한 부담을 유치원과 학교가 대신 덜어주고 있다. 즉, 아이가 느리게 성장하는 비용을 분담하려다 보니, 인류가 사회적 협력과 유대를 발전시키게 된 셈이다.


정리해 보자면, 인간의 고품질 식량 수집, 지연된 발달, 양육에 대한 큰 에너지 채무 등이 오히려 사회가 복잡해지는 데 기여했다. 인간의 큰 뇌 또한 세대를 건너 전달되는 수많은 기술과 정보, 문화를 학습하기 위한 진화의 산물이다. 그러기 위해 당장의 번식보단 성장과 관리에 체화된 자본을 투자해야 한다. 덕분에 인간은 느린 생활사 전략을 가지는 종이 되었다.


하지만 인간이 오직 느린 생활사 전략과 k-선택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생태 환경의 변화에 따라 빠른 생활사 전략과 r-선택도 유동적으로 선택되기도 한다. 앞서 보았듯이 예측 불가능하고 불안정한 환경은 빠른 생활사 전략을 촉진할 것이다. 현대에도 사회적 안정망, 경제적 안정성, 부모의 정서적 지지, 주변 환경에 따라 아동이 성인으로 성장할 때 어떤 생활사 전략을 가지게 되는지 대략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이를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아기에 가혹하고 무신경한 양육, 가족의 갈등, 불안정한 애착을 겪은 아동에게서는 성인이 돼서 성적 조숙, 단기적 연애, 여러 성적 파트너와 많은 자식, 충동적이고 현재 지향적인 성향, 착취적 대인관계 같은 성향이 나타나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은 스트레스의 단서로 작용해 남성에게선 공격성과 반사회적 성향, 여성에게선 불안과 우울증의 증가가 나타난다. 불안정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의 생애를 연구한 결과, 아이가 성인이 된 후에는 남녀 모두 기회주의적이고 착취적인 대인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대로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가정 주변의 지역적 환경, 잦은 거주지 변화, 불안정한 경제 상황, 사회적 안정망의 부재, 부모의 낮은 사회경제적 지위 등은 빠른 생활사 전략을 촉진한다. 그중에서도 아동기의 사회경제적 지위(Socio-Eeconomic Status, SES)는 생활사 전략을 측정하는 주된 결정 요인 중 하나이다. 높은 사망 단서나 경제적 불확실성으로 인해 SES가 낮은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단기적 이득에 초점을 맞추고 위험에 지나치게 반응하는 경향을 보인다.


빠른 생활사 전략은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 가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모두가 이 불편한 진실을 알고 있다. 가난하고 폭력적이고 자녀의 미래에 무관심한 부모 밑에서 자란 어른 역시 단기적 이익 추구, 충동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성향, 적은 양육 투자, 높은 스트레스와 불안, 짧은 수명을 가질 확률이 높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적인 문제이지,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정치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반면 SES가 높은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부모로부터 많은 투자와 정서적 지지, 사랑을 받으며 자랄 확률이 높다. 그런 아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어른이 되기 쉽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정서적 애착이 잘 형성된 아이는 목표 지향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인내심이 높고, 심리적으로 안정적이고, 타인에게 친절한 어른으로 자랄 것이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성격이 느린 생활사 전략과 관련이 있다는 연구도 이를 뒷받침한다.



점점 더 빨라지는 대한민국


현재의 대한민국은 어떤 생활사 전략을 추구하고 있을까. 나는 빨리빨리를 외치는 대한민국이 실제로도 빠른 생활사를 추구하는 사회로 추락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빠른 생활사 전략을 선택하는 환경은 기본적으로 불안정한 환경, 높은 스트레스, 단기적이고 현재 지향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환경이다. 가난하고 미래가 불안정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런 선택을 한다. 저소득층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 대부분이 어릴 때부터 높은 스트레스에 노출되고, 수준 낮은 교육을 받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어떠한 지원과 지지도 부모와 사회로부터 제공받지 못한다. 우리나라는 상황이 더 심각하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경제적 불평등과 관련해 세계 최하위권의 국가다. 어떤 사람들은 부자가 더 많은 부를 가지면 투자를 통해 부의 분배가 일어난다고 한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학자들과 IMF조차 ‘낙수 효과’가 틀린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월스트리트에서 가장 성공한 투자 전문가 레이 달리오조차 자본주의의 한계와 부작용을 지적한다. 레이 달리오는 사회적 갈등이 극심해지고 중산층이 무너지는 이유에 대해 자본주의 자체를 지목한다.


‘자본주의가 모순적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은 틀렸다. 최대한의 이익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속성 때문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는 한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모순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너무 잘 작동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부의 불평등과 양극화 현상은 필연적이며, 그에 따라 사회적 갈등과 불안, 스트레스는 점차 증가한다. 따라서 부유층의 세금을 인상하고, 복지를 확대하고, 사회적 안정망을 확충해서 불평등 수준을 낮춰야 한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이자 자본주의의 승리자가 할 법한 말이 아니긴 하다. 그래서 더 귀담아 들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학자들마저도 부의 불평등을 걱정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경제적 불평등에 관해 큰 관심이 없다. 그저 경제성장과 GDP 수치, 수출 흑자 같은 내용만 뉴스에 나올 뿐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살기가 힘들어지고 삶이 팍팍해진다고 느끼는데, 그 앞에서 국가의 경제력 순위를 논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수출 최고치를 축하하면서 가계 부채의 최고치는 왜 말하지 않는지, 가계 가처분 소득이 줄어들고, 불평등 지수가 높아지고, 청년 자살률이 높아지고, 국민의 행복도가 줄어드는 숫자는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국가의 발전을 고무하는 수와 국민의 불행을 암시하는 수가 취사선택되는 뉴스를 보면서, 나는 다시 애국심을 고취해야 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졌다.


다만 나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그런 사람들이 어떤 사회를 만들어나가는지 궁금할 뿐이다. 우리나라의 경제 순위가 올라가고, 국내 총생산을 반영하는 수도 올라가지만, 국민의 행복과 삶의 질을 반영하는 수는 오히려 내려가고 있는데, 나는 그 무의미한 수로 다만 사람들의 심리를 짐작할 뿐이다. 수는 절대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수는 단지 측정한 결괏값을 기술할 뿐이다. 수는 무미건조하고 냉혹하지만, 그렇기에 현실적이다.


그 숫자는 모든 면에서 한국 사회가 빠른 생활사 전략을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불안정하고 불안한 사회, 극도의 경쟁에 지친 스트레스 사회, 모두가 날이 서 있고 예민한 사회, 단기적인 이익과 쾌락을 중시하는 사회, 사회적 공감과 연대가 무너진 사회, 그래서 모두가 적자생존의 정글 속에서 각자도생 해야 하는 사회. 나는 한국 사회가 그렇다고 본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극단에 치우친 보수주의의 이데올로기가 깔려있어서라고 본다. 그래서 나는 보수주의가 사회의 중심 이데올로기가 되면 왜 다수가 불행한 사회가 되는지, 보수주의를 움직이는 근원적인 동력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한다. 보수주의자가 누구인지 이해함으로써 무너진 균형추를 다시 바로잡기를, 건강한 보수주의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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