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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양이 Oct 27. 2024

호모 모랄리스(Homo Moralis)


1985년 9월 19일, 멕시코시티의 라사토 카르데나스 해안가에 규모 8.0의 지진이 강타했다. 9,500명이 사망했고, 건물 대부분이 무너졌다. 미국의 구조견 전문가 케롤라인 헤바드가 구조견 앨리와 함께 급파되었지만, 잔해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시체뿐이었다. 


 앨리의 귀는 실망으로 축 늘어졌다. 생존자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다른 구조견들도 의욕을 잃고 밥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수의사는 구조견들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잔해 속에 숨어 연기를 해야 했다. 오랜만에 생존자를 찾은 개들의 기분은 좋아졌고, 다시 구조를 시작할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을 느끼겠지만, 스키너라면 다른 생각을 했을 것이다. 스키너 상자(Skinner Box)로 유명한 행동주의 심리학자 스키너는 자극과 보상 메커니즘으로 인간 행동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겼다. 스키너는 감정을 의미 없는 부산물로 보았고,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안기는 것은 모유라는 보상을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다른 행동주의자들 역시 사랑과 동정심, 슬픔과 공감 같이 인간성의 필수적인 요소를 모두 이기적 욕망의 한 갈래로 취급했다. 


 하지만 20세기에 맹위를 떨치던 행동주의는 한 대학원생의 실험 하나로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해리 할로라는 젊은 심리학자가 어린 원숭이를 대상으로 먹이를 주는 철사 어미와 아무것도 주지 않는 천 어미 중 누구를 더 좋아하는지 실험한 것이다. 


 먹이라는 보상을 생각한다면, 붉은털원숭이 새끼는 우유를 주는 철사 어미인형에 붙어있어야 했다. 하지만 새끼는 우유를 먹을 때를 제외하고는 하루종일 천 어미 인형에 매달려 있었다. 어미의 따듯한 접촉과 사랑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사랑과 유대감은 그 자체로 보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키너의 망령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행동경제학자들은 인간을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적 존재로만 보며, 보수주의자들은 욕망을 쫓기만 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해결할 거라 믿는다.『국부론』을 쓴 애덤 스미스를 신으로 추앙하는 이유다. 하지만 스미스가『국부론』이후에『도덕감정론』을 쓰고, 타인의 행복을 보는 것 자체가 기쁨이라고 말하며 줄곧 동정심과 연대를 강조한 것에 대해선 애써 눈길을 돌렸다. 


 생물학계도 마찬가지였다.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이기적 유전자』에서 “개인들이 공동선을 위해 이기심을 버리고 협력하기를 바란다면, 생물학적 본성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라고 암울한 결론을 내린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 역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국가와 문화가 인간의 야만적 본성에 문명의 옷을 입혔다고 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생물학자들이 이런 비관주의를 굳게 믿게 된 데에는 다윈의 불독이라 알려진 토마스 헉슬리의 공이 크다. 다윈은 자기 이론을 설파하기에는 너무 수줍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진화론이 아내를 비롯한 세상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힘들어해서 강연이나 토론회 같은 데는 일절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해서 싸워줄 투사를 선택했는데, 그게 바로 헉슬리였다. 


 하지만 헉슬리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93년 옥스퍼드 대학 강연에서, 인간을 잡초 퇴치에 애쓰는 정원사로 비유했다. 도덕과 윤리야말로 인간이 진화에 맞서 승리한 결과라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악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교육과 처벌을 통해 행동을 교정해야만 사회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입장인데, 성악설이라는 형태로 대중에게 퍼져 나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도덕성의 뿌리를 어디서 찾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출발점을 홉스로부터 시작하면 사회는 처벌과 통제 메커니즘에 의해 작동해야 한다. 아이들은 순수하지만 자기중심적인 악마가 된다. 교육은 아이들을 처벌하고 고통을 주어 훈육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복지와 재분배 정책 역시 쓸모없는 것이 된다. 인간의 본성은 원래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정치인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그러나 집단을 이루어 사는 동물들에게 도덕성이 발달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집단 속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타인에 대한 배려, 옳고 그름에 대한 직관이 기본 모드(Default Mode)로 작동하는 것이 유리하다. 이기심은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도덕성을 고결한 신념이나 희생, 욕망을 절제한 결과로 보는 오류를 범해왔지만, 도덕의 계보는 생각 이상으로 오래되었으며 진화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대표적인 도덕적 감정은 수치심과 죄책감이다. 죄책감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처럼후회하는 것을 말한다. 수치심은 "쳐다보지 마. 난 쓰레기니까"라는 느낌에 가깝다. 형태는 다르지만 모두 사회적 위계와 규범을 어기거나, 타인에게 피해를 줬을 때 내면의 목소리가 외치는 양심의 비명이다. 집단이 가하는 처벌은 사회적 동물에게 생존이 달린 문제기 때문에, 도덕성이 진화해야 할 만한 이유는 차고 넘친다. 다윈 또한 사회적 동물에겐 양심 비슷한 것이 발달할 거라 예측했다. 


 도덕성은 우리의 존재 자체에 닻을 내리고 있으며, 희생이나 이기주의는 더더욱 아니다. 우리에게 선한 본성이 없다면 설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완전히 도덕적인 존재라면 초등학교 때부터 도덕을 가르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도덕성은 환경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는다. 그래서 정치가 중요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정치를 통해 도덕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것뿐이다. 이때 우정과 공감, 두려움과 불안, 분노와 혐오 같은 다양한 영장류적 감정들이 정치적 판단을 도와준다. 우리가 침팬지와 보노보에게 한수 배워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보수나 진보이기 이전에, 도덕적 존재인 호모 모랄리스(Homo Moralis)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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