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8월 24일, 독일군 폭격기 두 대가 야간비행을 하다 길을 잃었다.
조종사들은 대공포화를 받자마자 서둘러 폭탄을 떨구고 도망쳤다. 런던 시내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지자, 분노한 윈스턴 처칠은 베를린에 공습을 명령했다. 독일 역시 가만히 있지 않았다. 9개월 동안 8만 개의 폭탄이 런던에 투하되었고, 영국 행정부는 공황에 빠질 민간인들을 위해 정신병동을 건설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신병동은 텅 비었다. 약탈과 방화, 살인과 강간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알코올 중독과 자살률이 줄어들었고, 시민들의 정신 건강이 오히려 향상되었다. 잿더미가 돼버린 런던에서는 희망이 넘쳐났다. 노동자와 자본가 간의 갈등이 잊혔고,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서로를 도왔다. 파괴된 도시의 무기 생산량은 포격을 받지 않은 도시의 생산량을 추월했다. 런던 시민 4만 8천 명이 사망했지만 홉스가 말했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영국의 포격을 받은 베를린에서도 마찬가지 일이 일어났다.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공포와 죽음이 넘실거리는 곳에선 항상 폭력과 범죄가 들끓고 문명의 옷이 벗겨지지 않던가?
진실은 반대편에 가깝다. 위험에 처한 사회적 동물에게 가장 좋은 전략은 상대의 것을 빼앗거나 죽이는 것이 아니다. 서로 뭉치는 것이다. 잿더미가 된 런던에서 마찬가지였다. 두려움을 이겨내려는 희망과 용기, 희생정신과 이타심이 전염되었기에 강한 협력의 물결이 일어났던 것이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바로 편도체 때문이다. 편도체는 아몬드처럼 생긴 아주 작은 부위지만, 생명체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편도체는 공포 기억을 형성해 위험한 대상으로부터 도망치게 하고, 불안이나 혐오라는 감정을 만들어 잠재적인 위험 대상에 접근하지 않게 한다.
편도체는 공격성에도 관여한다. 20세기까지만 해도 생물학자들은 공격성을 위험하고 제거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지만, 이제 관점이 바뀌었다. 공격성이 없으면 동물은 살아갈 수 없다. 생명체에 필수적인 동력을 제공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폭력은 공격성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일 뿐, 자기 방어, 짝짓기, 종족 보호, 사냥을 위해서도 공격성은 필수적이다. 이를 방어적 공격성이라 하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공격성은 타인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는 게 그 목적이 될 수도 있다. 겁에 질린 개가 먼저 짖는 것처럼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남들보다 큰 편도체를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죽음이나 사고, 불확실한 미래, 새로운 변화, 경쟁 집단에 대한 불안을 많이 느끼며, 공격적인 태도도 강하게 보인다. 하지만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내집단에 대해 애정과 충성심이 강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게 바로 보수주의의 심리적 뿌리이자, 생물학적인 동기다. 정치학자 존 히빙은 보수주의자가 공격으로부터 생명과 신체를 방어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발견했다. 범죄자를 강하게 처벌하거나 군사적 대응에 찬성하는 동시에 더 뚜렷한 놀람 반사를 보이는 것도 역시 보수주의자였다. 미국의 보수적인 주에서는 범죄율이 높은 시절에 사형 선고와 집행이 증가했다. 진보적인 주에서는 오히려 감소했다.
공포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증오와 충성심은 꼬리를 무는 뱀처럼 맞물린다. 보수적인 학생들에게 죽음에 관한 글을 쓰고, 타인의 정치성향에 따라 컵에 핫소스를 따르라 했을 때 학생들은 자신과 같은 신념을 가진 학생들에겐 조금 따랐지만, 다른 신념을 가진 학생들에겐 두 배가 넘는 핫소스를 부었다. 시험에 관해 생각해 보라고 했을 때는 둘 다 별 차이가 없었다. 불안과 공포가 내집단의 신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을 해치려는 욕구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다른 실험도 마찬가지였다. 죽음과 9.11 테러를 떠올린 보수주의자들은 미국에 위협을 가하지 않은 국가들에게도 선제적인 핵이나 화학 공격에 찬성했다. 다른 연구에서는 외국인 용의자에게 고문을 허용하는 데 찬성했다. 보수적인 이스라엘인들은 팔레스타인과 이란에 대한 핵 공격을 지지했다. 이란 대학생들은 미국에 대한 순교와 자살 폭탄 테러에 더 큰 관심을 드러냈다.
편견과 차별로도 이어질 수 있다. 죽음을 떠올리면 특정 집단을 선입견으로 바라보게 된다. 죽음을 떠올린 의대생은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이슬람교도를 진찰한 후 별로 심각하지 않다고 추정하지만, 기독교인을 진찰하면 심장병 위험이 심각하다고 진단을 내린다. 죽음을 상기한 미국인들은 단정하고 체계적인 독일인, 여자 같은 남성 동성애자, 저녁식사 비용을 내는 남성, 아이들을 돌보는 여성을 선호한다. 고정관념과 편견이 개인의 무지나 혐오이기 이전에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는 증거다. 모두 자신이 속한 집단을 도덕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심리적 체계인 것이다.
그렇게 인류는 선과 악을 구별하고, 우리와 그들을 구별하고, 죽음과 불안에 맞서 왔다. 전쟁과 테러는 타고난 폭력성의 발현이라기보다는, 군집성의 끔찍한 부산물인 셈이다.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도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공격성은 그것의 짝인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공격성 없는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격성과 사랑은 뒤섞인다. 새끼를 엄하게 기르는 붉은털원숭이 어미는 딸과 평생 유지되는 가까운 관계를 맺는다. 침팬지는 딸을 거의 혼내지 않지만, 그만큼 자식과의 관계가 빈약하다. 단순히 공격성을 기준으로 보면 붉은털원숭이는 나쁜 어미, 침팬지는 좋은 어미지만, 유대를 기준으로 하면 결과는 정반대가 된다. 우리도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구에게 상처를 되는 말을 쉽게 하지 않던가. 혼나는 아이는 울면서 어머니의 품에 매달리고, 애정과 용서를 갈구하며 부모를 더 사랑하게 된다. 애착은 그런 식으로 강화된다. 사랑 호르몬이라 부르는 옥시토신을 코로 흡입하면 자국민에 대한 애정이 증가하지만, 동시에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증가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보수주의자가 이민자와 낯선 문화에 반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모순되는 듯 보이는가? 한때는 공격성을 반사회적으로 규정하며 사라져야 할 것으로 보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낡은 이론이 되었다. 공격성의 목적 중 하나는 관계의 우위를 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사회적이다. 더욱이 공격성 안에는 그것이 초래할 결과를 완화하고 승화시킬 수 있는 완충 장치가 숨어있다.
보수는 태생적으로 불안과 두려움을 많이 느끼는 존재이기에 강한 공격성과 지배욕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치열하게 다투고 경쟁하는 과정에서, 협력과 우정이 싹트기도 한다. 비가 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싸우고 난 뒤에 관계는 더 단단해진다. 실제로 스포츠 경기를 하면 내집단에 대한 애정이 강해지고, 힘든 훈련을 견뎌낸 후엔 전우애가 강해진다. 호감과 혐오감, 협력과 경쟁, 통합과 차별 모두 보수주의자를 설명하는 단어가 될 수 있다.
진실은 언제나 안개처럼 희미하고 축축하게 떠다닌다. 진보는 보수주의자들이 폐쇄적이고 자기 사람만 챙긴다고 불평하지만, 그 역시 질서와 안정이라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보수주의자는 더 겁이 많기 때문에 더 협력하고 결집할 수 있었고, 많은 것을 이루어 낼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국가나 문명이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만들고, 호모 사피엔스를 성공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