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털원숭이 한 마리가 나무 그늘에 앉아 쉬고 있다. 그 옆에 서열이 높은 원숭이 한 마리가 지나간다. 사육사들이 어제 특식으로 주었던 스페셜 과일 세트에 입맛을 쩝쩝 다시던 녀석의 심장이 갑자기 두근거린다. 지나가던 원숭이는 괜히 녀석을 째려보고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을 한다. 마치 '알아서 처신 잘해'라고 말하는 듯하다. 녀석은 나뭇가지를 거칠게 흔들어대며 과시 행동을 하다가 거들먹거리며 퇴장한다. 눈을 깔고 꼬리를 축 늘어트린 채 파르르 떨던 녀석은 그제야 안숨의 한숨을 내쉰다.
빌라스파크 동물원에서 일하던 젊은 심리학자도 같은 광경을 보았다. 욕구 단계설로 유명한 에이브러햄 매슬로였다. 그는 기분이 좋아진 원숭이와 겁에 질린 원숭이를 보고 영장류에게 지배적인 느낌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학위를 받았다. 나중에는 사람에게도 붉은털원숭이와 비슷한 우월 감각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지배 감정'이라 불렀는데, 시간이 지나 좀 더 세련된 용어로 바꾸었다.
바로 자존감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자존감이 떨어졌다거나 올라간다는 말을 많이 한다. 모순이다. 정말로 자존감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평가에 좌우된다면, 우리는 왜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는 걸까?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에게서 공격성이 더 많이 표출되는 이유는 뭘까? 그냥 산 정상에 올라가 나를 사랑한다고 세 번 외치고 난 후, 동기부여 강사처럼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면 되지 않을까?
그게 어려운 이유는 자존감이 자기애와 자기 평가, 사회적 비교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모자이크 퍼즐 같기 때문이다. 그중 매슬로가 말했던 지배성 감각은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한다. 조건 없이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 자체가, 타인과 나를 비교하지 않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드러내준다. 인간의 마음은 붉은털원숭이나 침팬지의 것과 다를 바 없다. 자신보다 부족한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잘난 사람을 보면 자기혐오가 일어난다.
사회적 동물에게 비교란 숨 쉬는 것과 같다. 따라서 불평등은 사회적 문제이지만 동시에 심리적 문제이기도 하다. 빈부 격차가 심한 사회일수록 마음의 통증 역시 커진다. 낮아진 지위 거울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거울의 균열이 심해질수록 자아도 뒤틀린다. 불안하고 우울해진다. 스트레스와 열등감이 심해진다.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사람 만나는 것이 귀찮고 피곤해진다. 사회적 고립도는 심해지고, 타인에 대한 신뢰도는 바닥을 찍는다.
심리학자 아들러는 "모든 인간은 열등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열등감에 벗어나기 위해 방어기제를 만들어 낸다. 지나친 자기애와 자신감이 그 결과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자존감이 낮아지는 동시에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심리학자들은 경제가 성장하면서 불평등이 심해지는 시기에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는데, 자존감이 상승하는 동시에 불안증세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나르시시스트(Narcissist)라 부르는 자기애성 성격장애 환자 역시 늘어난다. 자존감을 측정하는 로젠버그 지수가 건강한 자기 효능감과 자기 방어를 목적으로 한 자아 부풀리기를 구별하지 때문인데, 흑인 사회처럼 낮은 사회적 지위와 차별을 경험한 인구 집단에게서 자존감이 높게 나타나는 역설이 여기에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소득 불평등이 심한 나라에서는 우울증과 공황장애, 불안장애 같은 정신질환이 평등한 국가에 비해 최대 세 배까지 높게 나타난다. 낮아진 지위는 무능과 실패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또한 불평등은 사회적 고립을 심화시킨다.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사회적 연결성이 희미해지거나 아예 끊어진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볼지 걱정하다 보니 사람과 만나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가 된다. 침대 속에 파묻혀 유튜브나 SNS를 보는 게 가장 편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유인원이다. 사회적 동물이 고립되면 마음에 큰 구멍이 생긴다. 그 구멍을 타고 중독이 스며든다. 심리학자 브루스 알렉산더 역시 중독이 사회적 문제라고 말한다. 다른 쥐들과 함께 사는 쥐가 격리된 쥐보다 마약을 훨씬 덜 섭취한 것처럼 말이다.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미군도 마찬가지였다. 숨이 막힐 듯 푹푹 찌는 베트남 정글, 값싸게 구할 수 있는 헤로인, 매일 죽어나가는 동료를 보면서 군인들은 자연스럽게 헤로인에 중독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중독된 군인들이 한꺼번에 고국으로 돌아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두들 두려워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참전용사들은 중독성이 강하기로 소문난 헤로인을 쉽게 끊었다. 그들 모두가 의지력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가정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중독의 본질은 게으름이나 자기 조절 실패가 아니다. 현실 회피다. 사람들은 지위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잠깐이라도 기분이 좋아지는 무언가를 찾아다닌다. 그래서 술, 마약, 도박 중독이 소득 격차와 비례하는 것이다.
쇼핑 중독과 과소비, 폭식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자 팀 캐서는 물질주의가 우울증, 낮은 자존감과 공감 능력, 외로움, 사회적 지배 경향성과도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불평등이 개인의 심리 상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자살률도 같은 맥락이다. 에밀 뒤르켐은『자살론』에서 이미 자살이 사회적 문제임을 입증했다. 한국은 OECD 자살률 순위에서 몇 년째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는데, 불평등 지수와 사회적 고립도에서도 선두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불평등은 사회적 편견을 강화시키고 공감 성향까지 낮춘다. 그 결과 약자에 대한 혐오와 괴롭힘이 늘어난다. 모두 타인의 가치를 낮추어 자신의 자존감을 보상받으려는 반작용인데, 심리학에서는 이를 '투사'라고 한다.
모든 사회에는 희생양이 있다. 불행하게도 인간 사회 역시 희생양 메커니즘이 존재한다. 인류학자 르네 지라르는 사회적 긴장이 높아지면 가장 약하고 이질적인 존재를 희생시켜 갈등을 해소한다고 말한다. 형태나 시기는 다르지만 중세의 마녀사냥,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 스트레스를 가족에게 푸는 직장인 등 모두 비슷하다.
그렇다면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갈등과 긴장이 극심해지고, 사회적 약자가 그 죄를 뒤집어쓰지 않을까. 실제로 그렇다. 쥐 두 마리에게 나란히 전기충격을 주면 서로를 공격하는 것처럼, 불평등한 사회일수록 어린이들 사이에 집단 괴롭힘이 더 흔하게 나타난다. 자신이 당한 만큼, 아니 그 이상의 분노를 만만한 대상에게 되갚아준다. 갑질, 진상, 학교폭력, 학부모 괴롭힘, 악플, 콜센터 직원에 대한 욕설 등이 그 결과다. 모두 한국 사회의 고유한 언어이자,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사회적 현상이다. '억울함'이라는 단어가 한국에만 있는 것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아야 하는 이유다.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사회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른다. 불평등이 심한 사회일수록 건강 상태가 나쁘고, 기대수명이 짧다. 유아 사망률, 정신 질환, 불법 약물 사용과 비만 비율이 높다. 폭력과 살인율, 수감률도 같은 그래프를 그린다. 아동의 행복 수준과 교육 성취도가 낮고, 10대 출산이 빈번하다. 사회적 신뢰도와 이동성도 바닥을 찍는다. 이기주의가 확대되면서 이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과 냉소주의가 퍼져나간다. 권위주의와 리더십을 동일시하게 되며, 그런 리더를 지도자로 선택한다. 그럼 구성원 모두가 그 모습을 보고 따라 하게 된다. 무리의 알파는 관심을 가장 많이 받고, 모방해야 할 역할 모델로서 선택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은 보수주의자가 원하는 게 아니다. 보수는 정당한 경쟁과 피땀 흘려서 노력한 것에 대한 보상을 원하는 것이지, 서열의 고착화를 원하는 게 아니다. 가족과 친구가 고통받는 것도, 공동체가 무너져내리는 것도 원치 않는다. 하지만 불평등이 선을 넘어서면 모든 노력과 경쟁이 무의미해지고, 사회적 사다리는 끊어진다.
보노보와 침팬지는 싸움에서 패배하면 고통의 비명을 지른다. 호모 사피엔스도 마찬가지다. 우울증, 자살, 분노, 중독, 사회적 고립 모두 형태는 다를지언정 호모 사피엔스가 내지르는 심리적 비명이다. 보수와 진보가 힘을 합쳐야 하는 이유다.
우리에겐, 여전히 털 고르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