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영화『화이트 월더니스』를 보면, 레밍 무리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장면이 나온다. 만화가 게리 라슨이 영화를 보고 레밍들이 줄지어 바다로 뛰어내리는 만화를 그렸다. 덕분에 레밍이 종의 번영을 위해 집단자살을 한다는 신화가 생겼다. 레밍 효과(Leming effect)'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했다.
재밌는 점은 혼자 튜브를 쓰고 있는 이기적인 레밍이 있다는 것이다.
나그네쥐라 부르는 레밍이 정말 인생을 나그네처럼 잠깐 살다 가도 좋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영화에 나오는 레밍의 집단 자살은 사실 턴테이블 위에 쥐들을 올려놓고 떨어지는 모습을 촬영한 것에다. 레밍은 주기적으로 새 서식지를 찾아 바다나 개울가를 횡단하는데, 이때 가끔 물에 빠져 죽는 것에서 오해가 생겨났다. 레밍족의 번영을 위한 고귀한 희생이 아닌 것이다.
우리 역시 이타심과 동정심을 희생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사욕을 추구하지 않고 남을 돕는 것은 희생으로 간주된다. 한때 진화론자들에게 동물의 이타적인 행동은 수수께끼였는데, 자연이 정글처럼 냉혹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혈연이 아닌 동료를 돕는 것에 본능의 오작동이나 부산물이라는 용어를 쓰며 유난을 떨었다. 유전자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다 보니, 개체의 복잡성과 유연함을 보지 못한 것이다.
이제는 조건 없는 도움이 사실 아주 흔하며, 자기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안다. 흡혈박쥐는 하루도 피를 빨지 못하면 살아남기 힘들기 때문에 높은 이타주의와 협력성을 가진다. 운수 좋은 날에 잔뜩 피를 먹은 박쥐는 배를 곪는 동료에게 피를 토해 준다. 그럼 도움을 받은 박쥐도 다음에 똑같이 피를 나눠준다. 그렇게 흡혈박쥐들은 위험을 분산하고, 서로 도우며 의존하는 삶을 살아간다.
이를 "호혜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이라 한다.
남을 돕는 것은 희생이나 손해가 아니다. 자신에 대한 투자이기도 하다. 인류는 스스로를 이기적인 존재로 생각하면서도 협력하고 배려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오직 경쟁과 탐욕만이 경제 성장의 유일한 길이라고 믿으며, 절벽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동정심은 냉혹한 현실 앞에서 순진한 것으로 치부된다. 심지어 진보주의자들 역시 애원하듯이 연민과 관용에 호소하는데, 결국 이타주의가 희생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고실험을 해 보자. 어린아이가 한겨울에 속옷만 입고 길바닥에서 떨고 있다. 온몸은 시퍼런 멍으로 얼룩져 있다. 그 상황에서 그냥 지나칠 사람이 얼마나 될까? 대부분 사람들의 마음속엔 연민과 슬픔, 분노가 치솟는 동시에 아이를 위해 뭐라도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앞선다. 보수나 진보 상관없이 말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희생과 손실에 불과하다면, 측은지심이 부르는 것이 진화할 이유가 있을까? 이유 없이 진화하는 건 없다. 실제로 고통받고 불행한 사람을 보면, 우리 뇌에선 조절이 불가능한 공감 스위치가 켜진다. 그럼 우리도 똑같은 심리적 고통을 받는다. 그런데도 고통의 전염성이 자연에 보편적인 것은, 그럴만한 생물학적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동료의 비명을 들은 동물들이 도망가지 않고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가는 것처럼 말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조금 더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동정에 호소할 것이 아니라, 약자를 배려하고 돌보려는 마음이 자연스러운 것이며,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점을 당당하게 어필해도 되는 것이다.
이제 이타주의가 희생이라는 생각은 버릴 때가 되었다. 타인의 불행을 자기 일처럼 아파하는 것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 우리의 DNA에는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가 나선 형태로 복잡하게 꼬여 있다. 공감과 배려심이 높은 사람들은 다른 이들을 챙기고 보살핌으로써 공동체 내에서 사회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었고 진화적으로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인간이 순한 늑대만 길러 골든 리트리버를 탄생시킨 것처럼, 우리도 스스로를 선한 존재로 길들여왔던 것이다. 이를 자기 가축화 가설(Human Self-Domestication Hypothesis)이라 하는데, 당연히 이 이론의 아이디어는 보노보에게서 나왔다.
우리에겐, 여전히 보노보의 피가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