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불을 지르는 일들 중 가장 달콤한 일은 먹는 일이다. 스트레스를 받는 날이면 늘 친구들과 맛집을 찾아다녔다. 맛있는 식사나 디저트를 먹는 순간만큼은 스트레스를 잊을 수 있었다. 물론 유효기간은 참 짧다. 그래서 맛집을 찾아가는 게 일상에서 정기적으로 벌이는 행사가 될 수밖에 없다.
하루는잠에서 깨서 벌떡 일어났는데 바로 넘어지고 말았다. 눈앞이 빙빙 돌아 서있기는커녕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30초 정도가 지나면 빙글빙글 돌던 게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조금만 움직여도 다시 돌기 시작했다. 망망대해에 멈춰있는 배 안에 있는 것 마냥 속이 계속 울렁거렸다.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겨우 잠들었다가 다시 일어났을 때도 여전히 눈앞은 빙빙 돌고 속은 메스꺼웠다. 엄마의 도움을 받아 응급실에 가서 5시간 넘게 검사를 받았지만, 의사는 병명도, 원인도 알 수 없다고 했다. 보통은 회전성 어지럼증을 호소하면 이석증이나 메니에르병을 의심하지만, 내 귓속 이석은 아무 이상이 없었고 메니에르병이라 확진할 수 있는 근거도 희박했기 때문이다. 검사 결과 모든 수치도 정상이었다. 결국 어지러움을 없애주는 약만 처방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약 덕분인지 보이는 게 회전하는 현상은 없어졌지만, 계속 어지럽고 멀미가 났다.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어서 3일 동안 누워있기만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3일을 굶은 사람 치고는 윗배가 너무 빵빵했다. 한의원에 가보니 위가 크게 부풀어 올라 꽉 막혀있다고 했다. 심각한 소화불량일 때도 어지럼증이 생길 수 있다고. 그러니까 어지럼증의 원인은 귓속이 아닌 위장에 있었다. 이제 먹는 것만 조심하면 문제없겠구나, 한시름 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렵고도 길고 긴 진짜 고생길은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는 걸,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무능력에서 오는 슬픔
보름 동안 죽만 먹었고, 그 후엔 소화가 잘되는 음식들 위주로만 먹었다. 외식은 하지 않고 먹는 양도 줄이고 음식 간도 심심하게 해서 먹었더니 조금씩 기력이 돌아왔다. 무엇보다 부풀어있던 위도 가라앉았고 어지럼증도 많이 호전됐다. 응급실에 다녀온 지 3개월 후부터는 예전처럼 먹고 싶은 음식도 다시 먹을 수 있었고 맛집도 갈 수 있었다.
한동안 괜찮았다. 빙빙 도는 경험이 주는 공포가 너무 컸기에 계속 조심하며 지냈다. 소화가 잘 안된다고 하는 음식들은 먹는 횟수를 줄였고 야식은 아예 끊었다. 이 정도면 앞으로 문제없겠지 싶었다. 차츰 낙관하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다시 몸져누웠다. 현기증이 심했고 물도 마실 수 없었다. 가슴 아래가 콱 막힌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서 증세가 더 심해지면 다시 세상이 빙빙 돌 것만 같았다. 마음이 복잡했다. 처음은 아니니 병의 원인을 몰라서 덮쳐오는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식습관을 많이 바꿨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런다고? 대체 어디까지 어떻게 바꿔야 해? 답답했다.
그 후에도 낫고 다시 아프고 또다시 낫는 생활이 반복됐다. 아플 때마다 식습관은 점점 더 소박(?)해졌다. 기름기 있는 음식은 다 끊고 어쩌다 고기를 먹더라도 삶아서 먹었다. 생야채도 소화가 안 되니 꼭 끓는 물에 데쳐 먹었다. 생과일을 먹는 것도 금했다. 이러다 보니 외식은 꿈도 못 꾸고 집에서도 먹을 수 있는 반찬이 많지 않았다. 같은 반찬의 연속. 이 생활을 언제까지 해야 할까? 왠지 서글펐다. 이게 뭐라고 서글프기까지 하나? 원래 패스트푸드는 찾아먹지도 않았고 기름기 있는 음식도 좋아하지 않는다. 생야채는 잘 먹었지만 또 못 먹는다고 해서 그다지 아쉽지도 않았다. 가족 중에 반찬은 간단하게 2∼3가지만 놓고 먹어도 된다고 말하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근데 왜?
평소에 좋아하지 않거나 찾아먹지 않더라도 먹고 싶을 때 언제든 먹을 수 있는 것과 아예 먹을 수 없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다. 케이크를 즐겨 먹진 않지만 어쩌다 한 번 먹고 싶을 때 찾아먹으면 꿀맛이다. 케이크뿐만이랴. 빵도, 기름진 음식도, 생야채나 생과일도 마찬가지다. 또 친구들과 만나서 음식점에 갈 때 메뉴판의 여러 음식들도, 어쩌다 모임에 가면 나오는 간식들도 맘껏 골라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음식을 가려야 하는 상황이 종종 생긴다. 어쩌다 올라오는 식욕도 참아야 하고, 그런 음식들만 놓여있는 상황에서도 먹지 말아야 하는 나 자신이 너무 무능력하게 느껴졌다.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지는 능력
내겐 먹고 싶은 음식을 원할 때 먹지 못하는 게‘무능력’이었다. 능력의 한계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없는 몸을 바라보니 슬플 수밖에. 이 마음은 음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하고 있는 일, 자기 계발, 꿈, 취미생활, 심지어 인간관계에서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때는 여지없이 좌절하고 만다.
너는 심경(心境)을 담박에 노닐게 하고, 의기(意氣)를 광막(廣漠)의 들판에 합하게 하며, 만물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면서 사사로움이 조금도 끼어듦이 없게 하라. 그러면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 질 것이다. (남회근, 『장자강의: 내편(하)』, 송찬문 옮김, 마하연, 2021, 1113쪽)
『장자(내편)』 중 「응제왕」에 나오는 구절이다. 천하를 다스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에게 장자가 해 준 답이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만큼 막대한 능력이 있을까. 무능력함에 빠져 슬픈 내겐 귀가 솔깃할만한 구절이다. 그런데 장자가 말하는 능력은 내가 생각하는 능력과 많이 다른 듯하다.
일단 마음 상태를 담담(淡淡)하게 노닐게 하라고 이른다. 음식에 빗대어 비유하자면, 싱겁게 먹으라는 것. 자극적인 맛들을 쏙 뺀 담백한 음식이 몸에 좋듯이, 이런저런 욕망들에 휘둘리지 않는 고요한 마음이어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광막의 들판’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아득하게 넓은 세계를 의미한다. 내 기운이 그 세계와 합일이 된다는 말 역시 목적하는 바 없는 청정함을 얘기한다. 나무 한 그루, 풀한 포기가 그러하듯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살면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저절로.
그러니까 내가 어떤 의도나 목적을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지 않고, 오히려 그 사사로운 마음을 내려놓으면 천하는 자연스럽게 태평해진다는 게 장자가 전하는 비법(?)이다. 바꿔 말하면 내 욕망이 천하를 어지럽힐 수도 있다는 것. 정말 그랬다. 적어도 내 세계에서는. 아픈 상황이 아니라 원하는 대로 먹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괴로웠다. 일이나 관계에서도,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좌절한다. 모든 욕망이 다 이루어지는 세상이 오지도 않겠지만, 있다고 한번 가정해보자. 내 욕망뿐이 아니라 모두의 욕망이 이루어지는 세상이 오면 우린 행복할까? 상상만 해도 무섭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일 테니.
욕망을 좇아 사는 게 아니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야 장자가 말하는 ‘천하가 저절로 다스려지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해도 후회, 안 해도 후회면 하는 게 낫다’는 말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하지 않아 후회하느니, 실패하더라도 경험을 쌓는 쪽을 선택하라고 조언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더 현실적이고 유용한 조언은 ‘하든 안 하든 후회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뭘 하든, 어떤 상황에 놓이든 기꺼이 수용하는 능력보다 더 큰 능력은 없다.
욕망에서 자유로운 삶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맛집에 간다고 했지만, 스트레스를 유발한 조건은 그대로 둔 채 자극적인 맛으로 스트레스를 잠시 잊게 만든 것뿐이다. 때로는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 스트레스를 잊으려 했기 때문에 더 스트레스가 쌓이기도 한다. 맛집에 갔을 때 만족도가 높듯이, 맛집에 가지 못하거나 맛집에서 음식을 먹었는데 기대했던 맛이 아닐 때는 불만족스럽기 때문이다. 욕망의 원리가 그렇다. 즐거움을 좇다 보면 괴로움이 따라온다. 즐거움만 취하고 괴로움을 피하는 방법은 없다.
욕망에서 자유로운 삶은 욕망을 마음속에 그대로 둔 채 참고 사는 게 아니라, 욕망의 원리를 이해하고 욕망이 끌어당기는 대로 무작정 따라가지 않는 삶이다. 욕망 없이 사는 게 아니라 욕망을 반복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삶이다. 욕망만 바라보지 않고 내가 놓인 상황 전체를 볼 수 있는 삶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누군가는 반문할 수 있겠다. 욕망을 좇고 살아야 삶이 더 나아진다고. 꿈을 이루고 성공하는 것도 다 욕망을 좇은 결과이지 않냐고. 과연 그럴까. 만약 작가가 되고 싶지만 글을 쓰기보다 스마트폰으로 SNS를 더 열심히 하는 사람, 직업을 바꾸고 싶지만 새로운 걸 배우기보다 게임하는데 더 열을 올리는 사람은 어떤 욕망을 좇는 걸까. 내 안에 수많은 욕망들이 우글댈 텐데, 선택적으로 욕망을 좇는 게 가능할까. 행여나 어떤 사람이 대단한 절제력으로 당장에 도움 되지 않는 욕망들을 참아서 마침내 꿈을 이뤘다고 하자. 그다음엔? 원하든 원치 않든 마음 한편에 꾹꾹 눌러놨던 욕망들이 튀어나올 텐데, 그걸 다시 잠재우기란 참아온 세월보다 곱절은 더 힘들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갖고 문란한 사생활을 즐기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멈추지 못하는 건 이 때문이다. 그들의 직업은 선망의 대상일지 몰라도, 그들의 삶은 절대 부럽지 않다.
우리처럼 '욕망'도 살아있다. 그래서 매번 달라진다. 불쑥 튀어나왔다가 금방 사라지기도 한다. 욕망에서 자유로워야 이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면 스마트폰이나 게임 등 자극적인 사물에 중독되지 않고 또 참을 필요도 없다. 그냥 매 순간 가장 적중한 일을 할 뿐이다, 그 순간들이 모여 어떤 삶을 펼쳐낼지는 당사자도 알지 못한다. ‘지금’ 중요한 일을 ‘가볍게’ 선택할 수 있고, 삶이 어떻게 흘러가든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는 것. 이게 우리가 진정 맛보아야 할 즐거움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