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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녕 Sep 14. 2021

직장인의 평생숙제, 일상의 균형

일상의 균형, '몸'으로 찾자

회사에서 밥 먹듯이 야근할 때가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밤늦게까지 일을 해서인지, 밤에도 사무실은 낮처럼 환했다. 사회적으로 ‘일과 삶의 균형’, ‘휴식 있는 삶’이 중요해지자, 회사에서는 밤 11시 이후면 무조건 전등을 끄고 사무실 문을 닫아 사람들을 강제로 퇴근시키기 시작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이 제도로 사람들은 정말 일을 줄이고 삶을 더 누릴 수 있었을까? 그럴 리가. 내일까지 마감해야 할 일은 그대론데 회사는 문을 닫아버리니, 이젠 그 일을 집에 싸들고 가서 해야 했다. 불평불만만 많아지자 그 제도는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다시 사무실은 밤낮 없는 곳이 되었다.


    정부나 회사가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 애쓰는 건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다. 그런데 단순히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의 근로시간만 준수한다고 해서 정말 일상이 달라질지 의문이다. 회사에서 달성해야 할 목표가, 프로젝트 종료일이, 보고서 마감일이, 상사의 요청이 여전히 긴박한 상황에서 근무시간을 지키라는 말은 답답하게만 여겨질 뿐이다.


    한편으로는 그들도 답답하겠지 싶다. 사실 일관된 지침을 내려야 하는 정부 입장에서는 회사마다의 상황을 고려할 수는 없을 테고, 회사는 근무시간을 지키기 위해 이익을 향한 확고부동한 목표를 내려놓기란 여간 쉽지 않을 테니. 그들이 내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의 줄임말)’을 찾아줄 때까지 기다리다간 영원히 일만 하다 늙어갈 수도 있다. 내 일이고 내 삶이다. 그들이 뾰족한 수를 찾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다. 어떤 상황에서건 스스로 워라밸을 찾을 수 있는 방법, 뭐가 있을까?



워라밸의 모호한 기준


‘워라밸’이라는 말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 마치 일은 삶의 일부가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양분된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삶을 ‘생활’이라고 바꿔 ‘일과 생활의 균형’이라고도 하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다. 일도 생활의 중심축 중 하나다. 좋아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하는 모든 일은 생활의 일부이고, 그것 또한 삶이다.


    워라밸은 돈을 벌기 위한 활동과 돈과 무관한 활동의 균형을 묻고 싶어 생긴 말일 거라 짐작한다. 돈이 목적인 활동만 하는 삶은 버티는 시간으로 대부분 채워질 가능성이 크다. ‘돈’이라는 결과가 중요해지는 순간 과정을 밟아갈 때 내 존재는 희미해지기 십상이다. 내가 갖고 있는 철학이나 윤리와 동떨어진 일을 할 때가 종종 생긴다는 점에서. 게다가 내 가치평가를 상사 아니면 고객이 할 테니 돈을 벌려면 그들을 만족시키는 게 우선이다. 나와 점점 멀어질수록 삶은 버틸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삶의 아주 작게나마 내 존재를 느낄 수 있는, 있는 그대로의 나여도 괜찮은 활동으로 채워야 우린 삶을 즐길 수도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워라밸은 버티는 삶과 즐기는 삶의 균형을 찾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것도 조금 아리송하다. 꽤 오랫동안 내 삶에서는 일이 전부였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지만 재밌었다. 때때로 “일하는 게 너무 즐겁지 않아?”라는 말을 동료들에게 건네기도 했다. 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뭐 이런 변종이 다 있나’였지만, 난 진심이었다. 기획하길 좋아하는 내 적성에 딱 맞는 일이었고, 프로젝트마다 새로운 걸 배울 수 있어서 즐거웠다. 돈을 버는 활동이지만 돈과 무관하게 일했다. 그럴 수 있는 환경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게 참 감사했다. 일이 버티는 시간이 아닌 즐기는 시간이 되어버린 생활에서는 워라밸의 기준을 어떻게 둘지 난감하다.


    돈을 버는 일이어도 즐거우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업무와 사생활의 경계가 없었다. 업무가 사생활이고 사생활이 곧 업무였다. 그러다 아프기 시작했다. 결막염으로 시작해서 장염도 걸리더니 이젠 알레르기까지, 온몸이 염증으로 뒤덮였다. 아무리 일하는 게 즐거워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건강을 먼저 챙겨야 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했다. 워라밸을 어떻게 찾을지를.



몸은 자연과 사회의 반영


몸이 아픈 이유가 단순히 일을 많이 해서였을까. 그랬다면 야근이 상대적으로 적은 직장으로 옮겼을 때 병이 나았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팠다. 긴 시간 질병을 앓고 나서야 깨달았다. 몸이 참 많은 얘기를 해주고 있다는 걸.


많은 사람들이 몸을, 정신을 둘러싼 ‘나’의 껍질 정도로 여기고 있지만, 몸은 본질적으로 생물학적 실체인 동시에 사회적 산물이라는 뜻이다. (…) 가히 인간은 소우주로서, 인간의 ‘육신(肉身)’은 자연과 사회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자연이 병들고 사회가 병들면 인간의 육신 또한 병들 수밖에 없다. (허훈, 『마음은 몸으로 말한다』, 이담북스, 2019, 111∼112쪽)


    몸이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인간은 활동할 때 필요한 에너지를 호흡하고 음식물을 섭취하여 만들어내는데, 두 가지 모두 자연이 주는 선물이다. 또 인간이 ‘소우주’라는 건, 우주의 원리가 인간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뜻이다. “태양보다 훨씬 크고 오래된 별들은 초신성으로 폭발하였다가 꺼져가면서 탄소와 산소, 질소, 기타 다른 무거운 원소들을 만들어냈다. 생명은 그러한 별의 원료로 만들어져 있다.”(린 마굴리스 외 1인, 『생명이란 무엇인가?』, 47쪽) 다시 말해 별의 탄생과 소멸의 흔적이 우리 몸에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것이다.


    몸은 사회의 반영이기도 하다. 돈을 벌려고 열심히 일하는 것도, 도덕적 판단에 따라 누군가를 좋아하고 추종하면서 또 다른 누군가는 비난하고 배제하는 것도, 디지털로 연결된 온 세상 사람들을 질투하고 비교하며 경쟁하는 사이 우울감과 좌절감에 휩싸이는 것도 몸이다. 그래서 몸을 보면 내가 살고 있는 사회의 모습을 고스란히 알 수 있다. 특히 질병은 이 사회가 어떤 모순을 안고 있는지 잘 보여주는 지표이자, 개인에게는 잠시 멈추고 삶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다급한 신호이기도 하다.


    온몸에 올라왔던 염증은 내 몸이 자연과 사회와 소통하는 가운데 어딘가 막혀있다는 걸 보여준다. 한 곳이 병들면 다른 곳도 병든다. 인간이 벌인 환경오염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처럼. 그래서 ‘이 사회가 문제야’ 식의 한 가지 요인만 탓하는 건 치유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어떤 증상이건 병을 안고 있는 현장이자 내 힘이 닿는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 즉, 해결의 실마리 역시 몸에 있다.



몸의 관계성이 워라밸의 핵심


몸에 주목하는 것도 하나의 요인만 보는 게 아니냐며 반박할 수 있겠다.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건 몸이 아니라 몸이 맺는 ‘관계성’이다. 자연과 사회라는 외부환경과 관계를 맺으며 내가 어떤 인식과 말과 행동을 만들어 내는지 봐야 한다. 한 번 더 주지하자면, 인간은 ‘소우주’다. 인간을 우주의 일부가 아니라 ‘소우주’라고 일컫는 결정적 이유는 독립된 주체로서 또 하나의 완전한 우주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화학 성분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화학 물질들의 작용에 따라 구별”(같은 책, 33쪽)된다고 한다. 끊임없이 변하는 외부 자극에 대응하여 독자적으로 몸의 항상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개인은 우주와 구별된다. 같은 이유로, 『동의보감』에서는 “한 사람의 몸은 곧 한 나라의 형상”이니, “몸을 다스릴 줄 알면 나라도 다스릴 수 있”다고 말한다.(허준, 『동의보감』, 191쪽)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우리는 변화하는 주체로서 매일 어떻게 살지 스스로 결정하며 산다.



    워라밸을 찾으려면 내 소통방식을 알아야 한다. 자연의 질서를 무시하고 밤에도 일하게 만든 인식이 무엇인지, 사회에서 주입하는 대로 따라 하는 말과 행동이 무엇인지, 그 인식과 언행은 어디서 왔는지 세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이때 몸을 보는 게 매우 중요하다. 우린 살아왔던 대로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테니, 내 과거와 미래가 압축되어 있는 현재의 몸을 보면 많은 걸 알 수 있다. 몸이 아프면 병증을 일으키는 부위를 보살피는 것으로, 몸이 건강하면 일과 동안 몸의 반응을 살피는 것으로 얼마든지 관계를 바로잡고 균형 잡힌 일상을 살 수 있다.


    일상을 보여주는 것도, 일상을 바꿀 힘도 ‘몸’에 있다. 일상을 바꾼다는 건 내 몸이 달라진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쪽만 변화하는 관계는 없다. 한쪽이 병들면 다른 쪽도 병들듯 한쪽이 건강해지면 다른 쪽도 건강해진다. 이 이치는 상대가 무한한 우주더라도 그대로 적용된다. 다른 방식으로 자연과 사회를 만난다면, 과연 그 외부환경이 여전할까, 아니면 전혀 다른 세상일까. 믿거나 말거나지만, 한 번쯤 깊게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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