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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녕 Sep 19. 2021

서로가 힘이 되는 삶의 진가

빛의 원리로 돌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각자가 차지하면서 줄어들게 되는 세상의 것들을 욕망의 목표로 삼으니, 질투는 사람들 한숨에 부채질을 하는 거란다. 그러나 사람들의 욕망이 위로 솟구쳐 가장 높은 하늘의 사랑을 향한다면 상실의 두려움이 그렇게 마음을 누르지는 않을 텐데. ‘우리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각자가 갖는 선도 더 많아지고 수도원에서는 자비가 더 세차게 타오를 것이다.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 연옥편』,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18, 138~139쪽, 15:49~57)


    “벌을 받아 마땅한 행동의 원인”이 되는 사랑은 공유할 수 없는 것을 탐하는 사랑이라고 했다.(이전 글 참고) 유한해서 전체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는, 그래서 남이 가질수록 내가 갖지 못하는 “세상의 것들”을 향한 사랑이다. 그러면 반대로 “모든 덕행의 씨앗”이 되는 사랑은 공유할 수 ‘있는’ 것을 탐하는 사랑라 추측할 수 있다. 전체를 가늠할 수 없는, 그래서 누가 더 많이 갖고 누가 더 많이 잃는지 알 수 없는 “하늘의 사랑”을 향한 사랑이다. 만약 동양고전에서 “하늘의 사랑”과 대응하는 말을 꼽는다면, ‘하늘의 이치(천리, 天理)’가 아닐까.


    ‘하늘의 이치’를 따르면 내 몫을 잃을까 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아니, 오히려 여러 사람과 나눌수록 자신의 몫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커진다고 한다. 누구에게라도 솔깃한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살고 싶다. 그런데 어떻게? 한눈에 알아보기도 어려운 ‘하늘의 이치’를 어떻게 알고 실천하며 살 수 있을까.



무한한 것들이 지닌 원


‘세상의 것들’이 유한한 것들을 의미하듯, ‘하늘의 이치’는 무한한 것들을 뜻한다. 유한한 것들이 지닌 원리가 있는 것처럼, 무한한 것들도 나름의 원리가 있다. 후자의 원리대로 살아가는 곳이 『신곡』에 나오는 천국이다.


하느님의 평화가 깃든 가장 높은 하늘은 계속 돌아가는 몸체 하나를 품고 있는데, 그 힘은 자체를 포함한 하늘의 모든 진수들을 감싸고 있어요. 수많은 별들을 거느린 그다음의 하늘은 그 하늘과는 다르지만 또한 그 하늘에 포함된 많은 본질들을 통해 그 힘을 퍼지게 합니다. 그렇게 또 다른 하늘들은 가지가지 색다른 모양을 지니면서도 가장 높은 하늘의 원래의 특성을 줄곧 유지합니다. 이렇게 우주의 조직은 그대가 보듯, 단계별로 진행하지요. 즉 위에서 힘을 받아 밑에서 작동합니다.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 천국편』,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18, 21쪽, 2:112~123)


* 출처 : 조이환, 「단테의 생애, 작품세계, 신곡 독후감」, 네이버 블로그(naver.com)

    “하느님”은 ‘무한한 선’이자 ‘하늘의 이치’를 말한다. “우주가 지향하는 목표”(같은 책, 13쪽, 1:108)라고 부르기도 한다. 단테가 그린 천국은 한마디로 ‘우주의 질서’를 보여준다.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가 머무는 하늘의 이름은 ‘정화천’이다. 정화천의 빛을 온전히 받아 다음 하늘에 나눠주는 ‘원동천’이 있고, 그 주위를 겹겹이 둘러싼 여러 하늘들이 제각기 운행하며 위에서 받은 빛을 아래로 나누고 있다. 그 하늘들에는 빛을 주고받는 별들이 있는데, 이들이 바로 천국의 영혼들이다.


    단테가 천국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영혼을 별로 표현한 게 참 흥미롭다. 단테가 보여준 지옥이나 연옥에서는 영혼들이 우리와 다를 바 없이 몸을 지니고 있다. 즉, 성욕, 식욕, 탐욕과 같은 원초적 본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천국은 영혼들의 형체를 볼 수 없으며, 단지 빛으로 존재를 드러낼 뿐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원초적 본능에 휘둘리지 않는다. 별의 중요한 특징 하나 더, 별은 빛을 내는 존재다. 그런데 별빛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빛이 아니다.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는 존재에게서 나오는 빛과 자신이 있는 하늘보다 더 높은 하늘에서 나오는 빛들을 한껏 받아 발하는 빛이다. 이제 보니 무한한 것들의 원리는 ‘빛’이구나! 어느 곳만 특정하게 비출 수 없는, 그래서 모든 곳을 동등하게 비추는 빛을 두고 사람들은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는다. 빛은 그냥 어디든 비출 뿐이고, 사람들은 그저 누릴 뿐이다.


    천국의 영혼들은 그렇게 빛을 주고받으며 사랑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정말 많은 이들의 아낌없는 증여로 자신에게 왔다는 걸 안다. 그 속에 ‘하늘의 이치’가 담겨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위에 있는 하늘로부터 자신에게 온 빛을 껴안아 자신의 방식으로 아래 하늘에 있는 별들에게 빛을 보낸다. 이게 “위에서 힘을 받아 밑에서 작동”하는 사랑이고, 우주의 질서에 순응하면서 내가 있는 자리에서 빛을 발하는 사랑이다.



모든 생명이 그물처럼 얽힌 세상


우리에겐 단테가 보여주는 천국이 참 생소하다. 빛의 원리로 돌아가는 세상은 작가 단테가 만들어낸 문학작품에서만 만날 수 있을 뿐일까. 산스크리트어로 된 격언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강은 자신의 물을 마시지 않고,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먹지 않고, 구름은 비를 내려 수확한 곡식을 먹지 않는다.” 강이나 나무, 구름, 어느 것 하나 자신이 맺은 결실을 자신의 것이라고 움켜쥐며 살지 않는다. 자연은 서로의 힘으로 산다. 굳이 남을 도우려 애쓰지 않아도, 자신의 생명력을 키우는 일이 곧 다른 것들의 생명력을 키우는 일이다.


    인간세상은 어떨까. 내가 공부하고 일하며 지금까지 살아오는데,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뿐만 아니라, 내 일을 자신의 일처럼 걱정하고 나서 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만큼 성장할 수 있었다. 또 내가 먹고 공부하고 일하는 것 중 어느 것 하나 나 혼자 힘으로 하는 게 있을까. 눈앞에 보이지만 않을 뿐이지, 그 공간들을 만들고 청소하고 운영하는 무수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일을 할 뿐이지만, 그들이 보내는 빛을 받아 내가 살아갈 수 있고 빛날 수 있다. 내가 많은 사람들의 힘을 받아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뭉클하다.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워진다. 그들처럼 나도 누군가에게는 영향을 줄 테니.


    돈도 그렇다. 돈 뒤에 수많은 ‘연결’들을 보면 돈을 어떻게 벌고 써야 할지 고민하게 된다. 운동할 때 단시간에 근육을 만들기 위해 매끼마다 닭가슴살만 먹었던 적이 있다. 인터넷으로 닭가슴살만 따로 포장된 식품을 쉽게 구매해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었다. 이 식사 뒤에 어떤 ‘연결’이 숨어있을까. 사육장의 좁은 공간에 움직일 틈도 없이 살고 있는 수많은 닭들이 있다. 밖을 볼 수 있는 창을 없애고 24시간 인공조명을 밝혀, 닭들이 낮이라고 착각해 계속 모이를 먹게 만든다. 또 유전자를 변형시킨 사료를 먹이고 성장촉진제와 항생제까지 먹인다. 짧은 시간에 닭들을 살 찌우기 위해서다. 가슴살이 큰 닭들만 나오도록 강제로 교배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자란 닭들은 잘 걷지 못하게 되는데, 식용이 목적인 사람들 눈에 닭들의 아픔이 보일까. 내가 먹은 닭가슴살엔 단백질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이 먹은 유전자변형사료와 성장촉진제, 항생제가 들어있고, 무엇보다 그들의 ‘고통’이 들어있다. 단백질로 근육을 키우면서 동시에 많은 것들을 잃고 있는 게 아닐까. 다른 생명과의 ‘연결’을 보면서 여러 의문이 생겼다. ‘내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근육이 어느 정도나 되길래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왜 꼭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높은 효과를 봐야 할까.’ 그 욕심이 수많은 생명들을 어떻게 만드는지 실상을 알면, 무조건 뭐든 많이 얻기만을 바랄 수 있을까.


* 출처 : 그린피스, 「공장식 축산 육류 및 유제품에 대해 모두가 알아야 할 11가지」, Greenpeace Korea(greenpeace.org/korea)


    세상은 무한한 원리로 돌아간다. 모든 생명이 그물처럼 얽혀 서로를 살리기도 하고, 서로를 죽이기도 한다. 남들을 불행하게 만들면서 우리‘만’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없다. 돈에 숨은 수많은 연결을 안다면, 적어도 무작정 돈을 늘려 쌓아 놓으려고만 하거나 어렵게 번 돈을 쇼핑이나 게임으로 금세 탕진하는 일은 멈출 수 있다.



재화는 운명의 손에 들려 있다


나를 비롯한 온 생명이 살고 있는 우주가 지향하는 목표를 내가 다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그 목표를 향해 사는 모습이 어떤지는 알겠다.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내가 돈을 얼마큼 더 갖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내 인생을 통틀어 봤을 때, 온 생명의 네트워크 속에서 지금 내가 어떻게 돈을 벌고 써야 하는지 깊이 숙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렇게 돈을 벌고 쓰는 태도는 재화가 “운명의 손에 들려 있”(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 지옥편』,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18, 71쪽, 7:61)다고 인정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운명에 따라 돈이 내게 올 수도,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갖고 싶은 만큼 가질 수 없고, 큰돈이 들어와도 내 능력만으로 이룬 일이 아니다. 그러니 돈을 좇는 일은 참 부질없다. 내 맘대로 안 되는 돈을 놓고 남과 싸우는 일은 더더욱.


    삶은 유한한 것의 원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런데도 유한한 것의 원리로만 살아간다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에 무지하다고 고백하는 거나 다름없다. 단테의 『신곡』 덕분에 유한한 것의 원리로 사는 길이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영원한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 길임을 알았다. 이 세상에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제 어떻게 살까. 내 힘만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무력감에 젖어 자포자기하며 살게 될까. 아니면 지금의 삶에 만족하며 예전보다 더 가볍게, 또 즐겁게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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