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녕 Sep 17. 2021

돈을 사랑하면 모두 불행해진다

공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랑

일할 때 매년 연봉협상을 하는데, 사실 협상보다는 통보에 가깝다. 계약서에는 회사에서 제시하는 금액이 찍혀있고, 난 거기에 사인할지, 말지만 정할 뿐이다. 사인을 안 한다고 하면 협상할 여지가 생길까.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 금액이 많은지, 아니면 적은지 크게 고민해본 적도 없고, 연봉협상은 그냥 반복되는 연례행사쯤으로만 생각했다.


    그렇게 월급, 연봉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도, 가끔 동료들이나 지인들의 말을 들으면 혼란스러워진다. 그들이 내가 하는 일의 양이나 강도에 비해 연봉이 너무 적다고 얘기하면, ‘정말 그런가, 돈을 더 받아야 하는데 바보같이 이러고 있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솔직히 내가 받을 합당한 월급이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계산해야 할지 모르겠다. 동종업계에서 주는 연봉을 평균 내봐야 하나, 아니면 월급을 한 달 동안 일한 시간으로 나눠봐야 하나. 하지만 어떻게 계산을 하건, 연봉에 만족한다는 사람은 못 봤다.


    돈은 그런 속성을 지닌 듯하다. 아무리 가져도 모자라다고 느끼게 만드는 속성. 많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벌고 나면 일을 관두고 여행을 가겠다고, 혹은 남을 도울 거라고 얘기한다. 그럼, 어느 정도 벌어야 만족할까.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양육하면서 돈 들어갈 일은 계속 늘어난다고 하면서 말이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들도 그들 나름대로 돈 들어갈 곳은 많다. 여럿일 때보다 집세나 식비가 더 들기도 하고, 혼자이니 노후나 아플 때를 대비해서 보험을 더 많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우린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돈에 만족할 수 없는 게 아닐까.



비교는 만족을 모른다


뭘 하든 항상 관심은 돈에 쏠린다. 어떤 물건을 사든 가격 대비 성능이 어떤지 따지고, 어떤 음식을 먹건 가격 대비 맛이나 양이 어떤지 평가한다. 시간도 돈이라는 생각에, 뭘 하든 가장 짧은 시간 내 최대 효과를 낼 수 있는 길을 모색한다. 그러니까 살면서 겪는 일의 가치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돈’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삶이 참 팍팍해졌다. 뭘 시작하기 전에 항상 내가 들인 노력에 비해 결과가 어떨지 엄밀히 따져보게 된다. 친구들을 만나서도 전체 인원수로 나눈 N분의 1로 똑같이 내지 않으면, 누가 더 많이 냈는지 신경이 쓰인다. 내가 해준 만큼 친구가 고마워하지 않는다고 느끼면 속상하기도 하다. 내가 일을 관둘 때도 친구들은 이제까지 일해서 쌓아온 게 아깝다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라며 뜯어말렸다. 아이가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고 하는데, 그 꿈을 마냥 응원할 수 없다고, 정말 운동해서 성공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털어놓는 친구들도 있다. 그 진로를 결정하고 이것저것 지원해줬는데, 도중에 아이가 흥미를 잃으면 그들은 다시 곤란해할게 뻔하다.


    내 것과 남의 것, 과거에 해왔던 것과 앞으로 해야 할 것,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끊임없이 비교한다. 이 비교 속에서 만족감을 느끼기란 불가능하다. 내가 1억을 벌었어도 옆 사람이 10억을 벌면, 난 1억이나 번 사람이 아니라 1억밖에 못 번 사람이 된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다. 아는 사람일수록, 나와 가까울수록 그가 잘되는 걸 기뻐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그가 잘돼서 기쁜 마음이 있더라도 질투하는 마음과 뒤섞여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게 된다. 심지어 난 왜 저렇게 하지 못했을까 자책하기도 한다.


    비교하며 살지 말자고 몇 번이나 다짐해 봐도, 마음은 자꾸 남의 것을 기웃거린다. 이것도 자연스러운 본능이라며 인정하고 살아야 하나. 그러기엔 삶이 너무 버겁다. 비교하는 마음을 어떻게 끊어낼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알아봐야 할 게 있다. 비교하는 마음은 왜 생기는 걸까.



공유할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둔 탓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은 다른 사람의 성공에 손뼉 칠 수 없는 원리를 알려준다. 작가와 같은 이름의 주인공, 단테 안내자와 함께 지옥, 연옥, 천국을 차례로 여행하며 만난 영혼들로부터 올바르게 사는 법을 배다. 사후세계 중 ‘연옥’은 죄를 지었지만 죽기 전에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친 영혼들이 있는 곳이다. 그들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지니고 열심히 죄를 보속한다. 그중 한 영혼이 단테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의 피는 언제나 질투로 부글부글 끓었소. 혹시나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면 사악해지는 내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거요. 내가 뿌린 씨앗에서 지금 이렇게 수확하고 있으니, 아, 인간들이여, 왜 공유할 수 없는 것에 자꾸 마음을 두는가?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 연옥편』,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18, 131쪽, 14:82~87)


    영혼은 자신이 질투의 죄를 저질러 이곳에 있다고 했다. 자신보다 잘 되는 사람을 괜스레 미워하는 마음이 질투다. 심해지면 그 사람이 나빠지기를 바라고, 그렇게 만드는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거나 주도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게 ‘공유할 수 없는 것’에 마음을 뒀기 때문이다.


    ‘공유할 수 없는 것’은 누군가 차지하면 다른 누군가는 잃어야 하는 것을 말한다. 부모님의 유산을 두고 자식들이 다투는 이유는 유산이 한정되어 있어서다. 다른 사람이 많이 가져가면 자신은 적게 가질 수밖에 없다는 걸 모두가 안다. 공평하게 나누고 모두가 그 방식에 동의하면 괜찮겠지만, 한 명이라도 자신이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형제자매들 사이의 다툼은 불가피하다.


    이렇게 ‘유한’한 재산은 비교가 쉽다. 정해진 재산이 어떻게 분배되었는지 숫자로 확연히 드러난다.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비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해야 하나.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돈만 보지 않고, 전체 재산 중에 내가 얼마나 가졌는지를 따진다. 남보다 적게 가졌다면 억울할 테고, 남보다 많이 가졌다 해도 더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한다.



모두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랑


결국 내가 모든 재산을 가져야만 비로소 만족한다는 얘긴데, 현실적으론 불가능하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설사 내가 다 가졌다 해도, 이때부터는 재산을 잃지 않기 위한 싸움이 시작된다. 공유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면 영원히 만족할 수 없고, 남과 끝없이 싸워야 한다.


사람들이 사랑하는 불행은 이웃의 불행이며, 이런 사랑은 진흙에서 세 가지로 솟아오른다. 어떤 사람은 남의 추락에서 자신의 성공을 바라다가 바로 그런 욕심 때문에 자신의 출중함을 잃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남이 높아지면 자기의 명예와 명성, 힘과 은총을 잃을까 두려워서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되며, 어떤 사람은 잘못된 격정에 휘말려 모든 열정을 복수에 쏟아 부으면서 오로지 남에게 해를 입힐 궁리만 한다. (같은 책, 157~158쪽, 17:113~121)


    한정된 것을 탐하다 보면 ‘이웃의 불행’을 자연스럽게 원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사랑하다니, 뭔가 범죄 같고 뉴스에서나 볼 법한 이야기 같다. 하지만 주변에서 흔하디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상이다. 부부의 연을 끝낼 때 내가 더 재산을 많이 가져가기 위해 남의 허물을 들추기도 하고, 부상이 걸린 대회에서 남이 나보다 못하길 바란다. 내가 1등이 되려면 남이 1등이 되지 않아야 하는 간단한 원리 때문이다. 공유할 수 없는, 유한한 것들이 지닌 원리.


    이 원리로 사는 사람의 마음은 교만, 질투, 분노에 쉽게 물든다. 이 마음이 계속 커지면 남에게 해를 입히기도 한다. 단테는 이 3가지 마음으로 짓는 행위들을 가장 중죄로 여겼다. 그래서 이 죄를 진 영혼들은 지옥의 깊은 곳에서 벌을 받는다. 견디기 힘든 지옥에서 벗어날 희망은 없다. 왠지 공유할 수 없는 것을 탐하는 길과 닮아 보인다. 영원히 만족할 수 없는 것과 영원히 고통받는 것.


    남보다 더 높이 올라서려고 하면서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자만하는 ‘교만’은 자신만 믿고 모든 일을 쉽게 판단하기 마련이다. 세상사는 단순하지가 않아서 보고 이해하는데 꽤 시간을 들여야만 하는데도,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다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그때의 결정이 자신과 남들을 결국 곤란에 빠뜨리는 것도 모르는 채로. 나보다 명예나 지위가 높은 사람을 보며 ‘질투’를 느끼면, 그를 미워하고 그가 잘못되길 바란다. ‘분노’도 마찬가지다. 만족을 몰라 모든 것을 불평하고 남 탓만 하다가 상대를 해코지한다. 교만, 질투, 분노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을까. “두려움은 남에게 해를 입힐 힘을 지닌 것들에게서만 나”(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 지옥편』,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18, 21~22쪽, 2:88~89)온다는 말처럼, 그들은 남들도 자신을 해할 거라 생각하며 불안에 떨게 뻔하다. 지옥이 따로 없다.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며 살고 싶진 않다. 남을 믿지 못하고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순간순간 교만, 질투, 분노의 마음이 내 안에 스며든다. 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면서 살아야 할까. 단테는 인간의 사랑은 “사람들 안에 자리하는 모든 덕행의 씨앗이 되기도 하고 벌을 받아 마땅한 행동의 원인이 되기도”(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 연옥편』,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18, 157쪽, 17:103~105) 한다고 말한다. 공유할 수 없는 것을 원하는 건 후자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나에게도, 남에게도 해롭다는 걸 명명백백하게 알았다. 그럼, 모든 덕행의 씨앗이 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어떻게 사랑하면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고, 다르게 살 수 있을까.



《계속》

이전 11화 항상 부족한 돈, 언제쯤 만족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