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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녕 Sep 09. 2021

평범하길 바라는 속내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상형?!

회사에서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한 사람이 자기 팀에 개성이 강한 신입이 들어왔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 입에서도 개성이 강한 몇몇 이들의 이름들이 튀어나왔다. 그러던 중 한 명이 ‘너도 개성이 강한 편’이라며 나를 지목했다. 그 말에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없을걸!”


    그 자리에 있던 동료들 중 아무도 이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정말 그렇게 믿고 있었다. 이력서의 장점을 쓰는 란에 ‘평범’이라고 적을 정도였으니까. 뭘 하든 무난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것 하나 눈에 띄게 잘하진 못하지만, 그렇다고 손가락질받을 정도로 못하지도 않았다. 무슨 일이건 원만하게 할 줄 아는 게 장점이라 여겼다.


    그날의 대화가 서로 자신이 더 평범하다고 우기다 끝난 걸 보면, ‘평범’하길 원하는 사람이 나뿐 만은 아닌 듯하다. 모두가 자신만큼은 평범하다고 생각했고, 남들도 그렇게 생각해주길 원했다. 근데 좀 이상하다. 왜 우린 개성이 강한 사람이 되길 원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인공지능의 등장과 더불어 인간 개개인의 개성을 찾아야 한다고 부르짖는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도 왜 여전히, 굳이 평범하길 바랄까.



평범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사실, 회사에서 어떤 사람이 개성이 강하다고 말할 땐 그 사람이 특출한 재능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에 비해 도드라져 보인다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크다. 내 경험상 그렇다. 남들과 의견이 다르거나 ‘보통이라면 이렇게 하겠지’, '상식적으로 이래야지'라는 예측을 벗어나서 행동하는 사람에게 ‘개성이 강하다’고 순화해서 말한다. 때로는 일을 못하는 사람에게 똑같이 말하기도 한다.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는 그냥 일을 잘한다고 얘기할 수 있지만, 일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직설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일을 더 잘하려는 마음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이것만큼 회사에서 튀어 보이는 것도 없다. 이때 그는 누구보다 ‘개성이 강한’ 사람이 된다.


    회사에서만 그럴까. 가끔 친구들과 이상형이 어떻게 되는지 서로 물을 때가 있다. 그러면 한 명은 꼭 이렇게 말한다. “난 평범한 사람이면 돼.” 나도 종종 평범한 사람이 이상형이라고 말해왔다. 그러면 이어지는 친구들의 대꾸 역시 매번 같다.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거든!” 어디에도 없다니! 이력서에 ‘평범’하다고 쓴 나 자신이 민망해지는 순간이다.


    반려자가 평범하길 원하는 건 어느 것 하나 모난 데가 없길 바라는 마음일 터. 그런데 모났는지 아닌지를 보는 기준은 내가 정한다. 정리해 보자. 회사에서도, 개인도 평범한 사람을 만나길 원할 때 마음은 하나다. 내 입의 혀처럼 내 마음에 쏙 드는 말과 행동만 하길 바라는 것. 내가 평범하다고 얘기할 때 내 속마음은 뭘까. 난 하나도 모난 곳이 없다고, 누가 보기에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었나 보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어떤 일을 하던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누구와도 잘 지낸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나 보다. 이제 보니 책임질 수 없는 말을 너무 쉽게 내뱉었구나 싶다. 친구들의 말처럼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상향이 ‘유토피아’인 것처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상형은 ‘평범한 사람’이다. 평소에 쉽게 내뱉었던 ‘평범’이란 단어를 ‘유토피아’와 나란히 놓고 보니, 이 말이 갖는 무게가 실로 엄청나다. 나와 내가 관계 맺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평범하길 바라는 마음은 모든 사람들이 내 말이나 행동을 문제 삼지 않길 바라는 동시에,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이 내 맘에 들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함께 오래 살아온 가족조차도 취향과 생각이 너무 달라 부딪히는 일이 부지기수다. 하물며 친구나 회사 동료들과 함께 하면서 문제가 없을 수 있을까.



문제가 없길 바라는 게 문제


타자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은 타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모른다는 데서 생깁니다. 작은 다툼이 생겨도 해결하지 못해 큰 상처를 입게 되고, 아니면 극도의 분노로 표출되어 나도 타자도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이런 일을 피하기 위해 우리는 타자와 깔끔한, 위생적 관계를 맺으려 듭니다. 타자가 내 삶에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어벽을 쌓아 올리는 것이죠. 그러나 그 방어벽 안에서 우리는 다시금 고통 속에 빠져듭니다. 혼자라는 불안감, 마음 둘 곳이 없다는 절망감이 찾아오는 겁니다. (신근영, 『사람은 왜 아플까』, 낮은산, 2017, 125~126쪽)


    모든 사람들이 내 맘 같이 말하고 행동하는, 그래서 문제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 세상은 오지 않는다. 이런 세상에서 문제 되는 상황을 겪고 싶지 않을 때, 우리는 대개 인간관계를 좁힌다. 내가 편한 사람들,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들하고만 지내기 위해서다. 그런 사람들과도 가끔씩 마음이 안 맞는 일이 생기면? 이 문제만 빼면 다른 건 다 괜찮은 친구라는 주문(?)을 자신에게 계속 걸면서 꾹꾹 참거나, 화를 내고 다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관계를 끊어버리거나, 둘 중 하나다.


    내 마음대로 인간관계를 선택할 수 없는 회사에서는 어떨까. 상사, 동료나 후임과 부딪히더라도 내가 원할 때 팀을 바꾸거나 관계를 끊을 수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는 정을 주지 말라고 조언하나 보다. 사업 파트너로만 여겨 내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지만 따지라고 한다. 근데 그게 마음대로 되나. 하루에 점심시간을 포함해서 최소 9시간씩 일주일에 무려 5일을 만나는 사이면 가족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사이다. 그 긴 시간을 마음을 닫고 거래하듯 일하라니, 애초에 불가능한 주문이 아닐까.


    회사 안에서는 내 힘으로 어찌하지 못하는 관계로 괴로워하고, 회사 밖에서는 관계를 계속 좁혀나가면서 이러다 혼자되는 건 아닐까 불안해한다. 그나마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과도 마음이 통한다기보다는, 문제를 만들기 싫어 불편한 일이 있어도 괜찮은 척할 때가 많다. 정말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어 보인다. 문제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 오히려 문제를 만들고 키우며 나를 고립시킨다. 사람들과 문제없이 “깔끔한, 위생적 관계”를 맺으려 하면 할수록 관계 맺는 능력은 줄어드는 것이다.


    이제는 장난으로라도 내 장점 중 하나가 ‘평범’이라고 얘기하면 안 되겠다. 내가 관계 맺는 일에 무지 서툴다고 고백하는 꼴밖에 더 되나. 문제를 일으키는지, 안 일으키는지만 보고 관계 맺는 능력을 평가할 수 없다. 살면서 아프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관계를 맺으면서 문제가 없을 수 없다고 이젠 좀 인정하자.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문제는 당연히 생길 터. 그 속에서 새로운 삶의 태도를 배웠는지, 안 배웠는지에 따라 한 사람의 관계 맺는 능력을 판가름하는 게 훨씬 현실적이고 정확하다.



배우는 관계는 모두 옳다


문제를 피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후부터 한동안은 문제라고 판단되는 순간마다 최대한 자신에게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억지로 좋은 척, 편한 척하는 대신 관계가 껄끄러워지더라도 최대한 문제를 숨기지 않고 불편한 마음을 상대에게 전했다. 이 과정에서 듣는 사람이 마음 상하지 않게 내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터득하는 게 새롭게 배우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 마음을 상대에게 솔직하지만 완고하게 전할 때, 난 어떤 삶의 태도를 배웠을까.


    뒤늦게 알아차린 사실이지만, 말의 표현을 빼면 하나도 바뀐 게 없었다. 알맹이는 그대로 둔 채 포장지만 계속 바꾼 셈이었다. 삶의 태도는 말과 행동으로 드러나지만,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는 가치관이 정한다. 문제를 바라보는 인식이 바뀌어야 비로소 새로운 삶의 태도를 배웠다고 말할 수 있다.



    인식이 딱딱하게 굳어지면 질수록 상대뿐만 아니라 자신도 가혹하게 대한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알았다. 지금 상황이 과거와 달라졌는데도 ‘난 이런 사람이어야 해’라고 정해놓은 기준을 똑같이 적용하다 보니, 기준이 나를 옥죄는 사슬이 되어버릴 때가 많았다.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나를 새롭게 바꿔나가는 것, 이게 바로 관계 맺는 능력이자 관계 속에서 내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어떤 관계에서건 괴로움을 느끼는 순간을 배움의 순간으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로 여길 수 있을 테니까. 내가 능동적으로 배우고 탐구하는 관계라면, 어떤 관계든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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