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속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들을 겪은 후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난 내 사정만 내세우고 타인의 사정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 내 사정은 속속들이 다 알지만 그들의 사정은 눈에 보이는 모습 빼고는 알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대부분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고 나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라고 믿”(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132쪽)었다. 타인에 대해 너무 모른 채 오해만 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고부터는, 타인이 나쁜 사람이라고 여겨질 때마다 상대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 사람 입장에서 이유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처음 몇 번은 상대방이 한 행동이 어떤 이유에서 나왔는지, 앞뒤 맥락을 추리하기만 해도 문제가 해결됐다. 상대에게 불편한 마음이 들다가도, ‘그 사람도 야근하느라 힘들어서 그래’, ‘예전에 가족과 사이가 안 좋다고 했잖아’ 등 상대가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요리조리 생각을 바꾸다 보면, 안 좋은 마음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이렇게만 하면 모든 사람들과 무난하게 관계 맺으며 지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나만의 단단한 착각이라는 걸 알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평소 알고 지내던 A와 최근 들어 부쩍 만나는 횟수가 잦아졌다. 그런데 만나는 횟수만큼 그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늘어만 갔다. 특히 그는 만날 때마다 다른 사람의 험담만 늘어놓았다. 욕하고 있는 그 행동을 정작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하고 있다는 걸 그는 모르는 듯했다. 마치 부모가 아이에게 왜 욕했냐고 혼내는데 그 잔소리가 욕설인 것처럼. 욕하지 말라며 욕하는 엄마를 아이가 이해하기 힘들듯이, 아무리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보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생각만 많아져 머리만 아프고 그를 향한 화만 더 치솟을 뿐이었다. 이럴 땐 관계를 끊는 게 유일한 선택지일까.
늘어만 가는 생각의 추
관계를 끊는 선택을 할지 고민하기에 앞서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모든 관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방법이 왜 통하지 않았을까.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난 매번 관계를 끊는 선택만 할 게 불 보듯 뻔했다. '만병통치약' 같았던 내 방법을 다시 들여다보자. 화가 났을 때 먼저 왜 화가 나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느 정도 이유가 분명해지면 정말 그 사람이 그런지 내게 물었다. 혹시 내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잘못 본 부분은 없는지. 그 사람을 두둔하다 보면 또 반대편에서 ‘그래도 그건 아니지’하는 내 마음이 올라온다. 그래도 잘못은 잘못이라고. 그럼 또 그 사람의 맥락을 내가 모르니 이럴 수도 있지 않겠냐고 하면서 그 사람을 옹호한다. 마치 그 사람을 변호하는 이가 내 마음에 들어와 나와 '100분 토론'을 벌이는 것처럼. 단, 시간은 제한 없이 내 마음이 편안해질 때까지였다.
대부분의 사건은 내 안에서 하루, 길게는 일주일 정도만 토론을 벌여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런데 A라는 강적을 만난 후로는 그를 대하는 마음이 편안해지기는커녕 더 불편해져만 갔다. 그 사람을 두둔할수록 내 마음에 반발이 크게 일었다. 수차례 변호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별다른 성과 없이 생각만 많아지니 머리도 아팠다. 생각만으로도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는 걸 이때 알았다. 몸은 기진맥진이고 마음은 천근만근인 상태. 이쯤 되니 이 관계를 잊어야만 내가 숨 좀 쉬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몇 날 며칠 토론을 벌인 탓에 마음속에서 쉽게 지울 수도 없었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동으로 생각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지경이 되고 만 것이다.
한참을 고생하고 나서야 내 방법이 ‘생각 불리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걸 깨달았다. 머릿속에 천칭 저울을 놓고 추를 올려 무게를 재고만 있는 셈이었다. 한쪽 접시에 생각 하나를 올려놓고, 반대편에 다른 생각 하나를 올려놓아 양쪽의 무게를 동일하게 맞춘다. 양쪽이 평행을 이룰수록 문제가 없어졌다고 생각하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이 두 배로 늘어나 전체적으로는 더 무거워졌을 뿐이다. 평행을 이뤘으니 해결됐다고 착각할 뿐, 실제로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억울하다는 생각, 상식적으로 저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들이 뭉게뭉게 생겨난다. 간신히 평행을 맞춰놓은 저울은 다시 내 쪽으로 기운다. 그럼 또 반대편에 다른 생각의 추를 놓는다. 이 과정을 몇 번만 반복해도 전체 생각의 무게는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첫 번째 추부터 내려놓기
우리는 새로운 것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과거의 이미지가 그것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볼 수가 없습니다. (…) 따라서 중요한 건 새로운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낡은 것을 제거하는 겁니다. 도전에 적절하게 대응할 때, 오직 그때에만 갈등이 없고 문제가 없습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관계에 대하여』, 정채현 옮김, 고요아침, 2009, 75쪽)
‘생각 불리기’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현실을 잘 보지 못한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면서 그 사람의 입장을 아무리 생각해본들 현실에 뿌리를 두지 않은 생각들은 모두 상상일 뿐이다. 그래서 그를 미워하는 마음만 더 커진다. 운 좋게 상상만으로 미워하는 마음이 없어졌다 하더라도 그를 오해하고 있다는 면에서는 바뀐 게 없다. 지금 불행하진 않아도 불행이 예고되어 있는 거나 다름없다.
머릿속 천칭 저울의 반대편 접시에 A를 옹호하는 어떤 생각도 올리지 않는 게 현명하다. 그를 옹호하려고 애쓴다는 건 그를 부정하는 첫 마음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A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야’라고 정해버린 순간부터 그가 궁금해지지 않는다. 그냥 그는 나쁜 사람이다. 이제 그 사람의 모든 행동이 그가 하는 말과 모두 어긋나 보인다. 정말 그 사람이 모든 행동을 그렇게 했을까. 혹시 내 눈이 그런 행동만 골라보지 않았을까. 또는 모든 행동을 내가 원하는 대로 끼워 맞춰 이해하지 않았을까. 답을 쥐고 있으면 그 답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기에.
관계 속에서 나타난 문제를 해결하는 첫 단추이자 핵심과제는 A를 부정하려는 첫 마음을 무턱대고 인정하지 않고 살펴보는 것이다. 답을 찾으려 하지 않고 문제 자체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내 첫 마음을 들여다보면 알게 된다. 그동안 쌓아왔던 경험과 인식에 따라 알게 모르게 고착된 ‘전제’가 그 안에 있음을. 그걸 때로는 ‘신념’이라 부르기도 하고, ‘기대’라 부르기도 한다. 옳고 그름을 가르는 신념이, 또는 ‘친구라면 적어도 이래야지’하는 기대가 선명하면 할수록 관계 맺는 능력은 점점 줄어든다. 상대가 바뀌고 상황이 달라지는 등 매번 새로운 관계를 내가 같은 방식으로만 대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겼다는 건 더 이상 내가 고수하던 방식으로 상대를 대할 수 없다는 사인이다. 관계를 보는 새로운 시선이 필요한데, 그러려면 전제를 버려야 한다. 내 가치관을 모조리 버리라는 게 아니라, 상대를 한 모습으로만 정해버린 첫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그래야 상대가 궁금해진다. A가 어떨 땐 말과 행동이 다르지만 매번 그렇진 않다는 점, 행동을 조심하려는 모습도 종종 보인다는 점,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정적이 흐르는 걸 싫어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다 보니 실수가 많아진다는 점, 비난했던 사람과 똑같은 행동을 자신이 하고 있다고 가끔은 스스로도 알아차린다는 점, 그때마다 당황스러워하며 이런저런 변명을 하기도 한다는 점 등은 그를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라고 규정지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모습들이었다.
관계를 실험의 장으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마음속 전제를 들여다보라는 말을 관계 속 모든 문제가 자신의 탓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상대가 무례하게 나오거나 어떤 폭력을 쓰더라도 ‘내 탓’이라고 하면서 자책하라는 말이 아니다. 문제가 생기면 냉정하게 문제를 바라보고 처신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미워하는 감정에 휘둘리면 해야 할 말을 제때 못 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관계는 쌍방으로 이루어지지만, 미워하는 감정만큼은 오롯이 내 몫이다. 내가 갖고 있던 어떤 생각이 그를 만날 때 부정적인 감정을 갖게 만들었는지 찾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친김에 한 가지 더. 내 마음만 붙잡고 있는다고 전제를 볼 수 있진 않다. 관계를 끊는 게 능사가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계를 끊고 상대를 미워했던 마음이 사라지면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하겠지만 오산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키는 전제가 작동하지 않는 것뿐이다. 전제는 관계 속에서만 감정을 요동치게 만들기도 하고, 이제까지 문제가 안됐던 걸 순식간에 문제로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관계 속에서 상대의 어떤 말과 행동이 내 마음 안의 어떤 전제를 건드렸는지, 양쪽이 어떻게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지 전체 그림을 봐야 전제도 알 수 있다.
그를 계속 만나야 그의 어떤 행동에서 내 감정이 출렁이는지 알 수 있고, 불편한 느낌이 드는 순간 그가 어떤 말을 내뱉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어떤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지 알면 내 힘을 빼거나 조절할 수 있다. 조건을 바꾸고 또 만나보면서 변화가 있는지 살펴보다 보면 관계 자체가 재밌는 실험의 장이 된다. 이때는 상대도 피하고 싶은 대상이 아니라 연구대상이다. 때로는 나의 관계 맺는 능력을 확장시키는데 도움을 주는 협조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그를 계속 미워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