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을 만났다. 단단히 체해있던 터라 약속 장소에 나가기가 힘에 부쳤지만, 집에서 가까운 곳이었기에 친구들 얼굴이라도 잠시만 보고 오자 싶어 외출을 감행했다. 그만큼 보고 싶었던 친구들이었다. 내가 아프니 우리의 대화 주제는 자연스럽게 ‘소화 문제’였다. 한의원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어도 속에 얹히기만 하고 나중에는 물만 먹어도 얹히기에, 입에 들어가는 모든 것을 끊은 지 2일째 되던 날이었다. 친구들이 각자만의 경험을 토대로 이것저것 먹어보라고 권유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친구 B와 나 사이에 논쟁이 붙었다. 나는 “이제는 물도 얹히니 지금은 뭔가를 먹을 때가 아니다”라고 주장했고, B는 “너 몸에 맞는 음식을 못 찾았을 뿐, 다른 음식을 시도해봐”라고 반박했다.
처음에는 내 상황을 왜 이렇게 몰라주나 싶어 답답했다. 급체가 아니었고 2주 이상 긴 시간에 걸쳐 단단히 얹혀온 터라 몸의 순환이 꽉 막힌 상태였다. 소화에 도움 되는 환이든, 가루약이든, 죽이든 다 먹어봤지만 계속 얹히기만 할 뿐이었다. 한의원에서도 하루아침에 풀릴 체증이 아니니 얹힌 게 살짝이라도 내려갈 때까지는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처방을 받았다. 그런데 왜 자꾸 체질에 맞는 약이나 음식을 찾아보라는 거냐고! 논쟁이 계속 이어지니, 이제는 왜 의미 없는 소모전을 계속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 답답했다. 친구든 나든 각자의 경험을 토대로 말하니, 누가 옳다고 명쾌하게 결론 내릴 수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설사 결론을 낼 수 있다 하더라도 먹지도 못해서 기력 없는 몸 상태로, 없는 힘을 쏟아가며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만큼 긴요한 얘긴 아니지 않나. 조금만 찬찬히 생각해봐도 내게 전혀 이롭지 않다는 걸 잘 알 수 있는데, 왜 그때는 논쟁을 멈추지 못했을까.
논쟁을 부르는 대화방식
생각해보니 B와는 이런 논쟁이 처음은 아니었다. 논쟁을 벌인 분야도 다양했다. 정치, 연예, 사회, 건강과 소소한 일상까지. 그런데 정작 논쟁한 내용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생각나지 않는 걸 보니, 논쟁의 원인이 대화의 내용보다는 대화하는 방식에 있는 모양이다.
B의 이것저것 먹어보라는 권유가 마뜩지 않았던 이유는 한마디로 ‘틀렸다’고 생각해서였다. 물도 못 삼키는데 먹어보라고 하는 건 ‘논리적으로’ 맞지 않으니 '바로잡아야' 했다. 그때부터는 B가 하는 말 중 맞지 않는 부분을 찾아내고 반론을 하는 쪽으로만 얘기했다. 나중에 논쟁이 반복되는 걸 깨닫고 다른 주제로 화제를 돌렸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 논쟁에 머물러 있었다. 마음속에선 친구에게 몇 번이나 묻고 있었다. ‘왜 사실과 맞지 않는 얘기를 자꾸 하는 거야?’
그러니까 내 대화방식은 이랬다. 내 기준에 사실과 맞지 않거나 동의할 수 없는 얘기가 나오면 그걸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다른 사람들의 말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서 지적하고 반박하면서. 상대가 날 설득시키거나, 아니면 내 말에 동의해야 다른 대화 주제로 넘어갈 수 있다. 이러니 즐거워야 할 친구들과의 대화가 매번 정치 주제로 심야 토론하듯이 무겁고 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B뿐만 아니라 누구와 대화하든 그랬다. 내겐 사실과 다름을 짚고 넘어가는 게 그렇게나 중요했다. 친구의 말이 사실과 다른데도 그대로 인정해버리면 내 뜻은 왜곡된 채 친구를 속이는 행위가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사실여부를 따진 결과, 대화에서의 기억은 반복되는 논쟁과 그 공간을 감도는 어색한 기류뿐이었다.
답답한 논쟁이나 벌이려고 아픈 몸을 일으켜 친구들을 만난 게 아니다. 보고 싶었던 친구들과 짧게라도 마주 앉아 소통하고 싶었다. 논쟁과 소통은 엄연히 다르다. 논쟁은 내 주장이 상대의 주장보다 얼마나 설득력 있는지가 중요하지만, 소통은 서로의 이야기가 상대에게 온전히 전해졌는지가 핵심이다. 소통을 위해 내 뜻을 투명하게 전달하려고 했지만, 되려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내가 대화하면서 뭘 놓치고 있는 걸까.
마음을 비워야 뜻이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방의 들창이 비어 있지 않으면 밝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유리구슬이 투명하게 비어 있지 않으면 정기를 모아들이지 못하지. 무릇 뜻을 분명히 밝히는 방법은 본래 마음을 비우고 외부의 사물을 받아들이며 담담하여 사심이 없는데 있는 것이니, 이것이 아마도 ‘소완’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박지원, 『지금 조선의 시를 쓰라』, 김명호 편역, 돌베개, 2007, 241쪽)
연암 박지원이 책을 좋아하는 친구 이서구에게 ‘소완’, 즉 책을 감상하는 방법들을 일러주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뜻을 분명히 밝히는 방법”이 “마음을 비우”는 거라니, 모르긴 몰라도 내 대화방식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 마음에 담은 뜻을 잊지 않아야 왜곡 없이 밝힐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란 말인가.
연암이 일러준 방법들은 이렇다. 먼저, 책을 읽을 때 책으로 둘러싸인 방에만 앉아있을게 아니라, 방 밖으로 나와 들창으로 방안을 바라봐야만 전체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책에 흩어져있는 지식 하나하나에 매달리기보다 전체 맥락을 봐야 한다는 조언이다. 또 유리구슬로 빛을 모아야 불꽃을 낼 수 있다는 비유를 들어, 책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집중해야 함을 알려준다. 이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들창이나 유리구슬이나 모두 투명해야 한다는 것! 투명하지 않은 들창으로는 방안을 볼 수 없고, 투명하지 않은 유리구슬로는 정기를 모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읽는 사람의 마음이 비어있지 않고 욕심이나 사사로움으로 가득 차있으면, 아무리 열심히 책을 읽어도 맥락과 핵심을 짚어낼 수 없다. 아, 그러니까 내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다는 거구나!
내 뜻이 상대에게 전달됐는지에만 정신이 팔려 B의 뜻을 내가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지는 살피지 못했다. 내 의견은 잠시 잊고 B가 한 말의 맥락과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자. B의 어머니는 나보다도 자주 체하시는 모양이었다. 어머니께서 여러 시도 끝에 찾은 체증의 특효약은 녹두죽. 뭐라도 먹어보라는 B의 말은 자신의 어머니 경험을 토대로 한 조언이었다. 내가 내 상황만을 기준으로 약의 형태가 중요하다고 말했듯, B는 자신의 경험을 참고해서 약의 성분을 강조했을 뿐이다. 시비를 가를 이야기가 아니었다. B가 말할 때의 표정이 생각난다. 여윈 내 모습을 바라보며 계속 안쓰러워하던, 함께 더 얘기 나누고 싶으니 좀 더 있다 가라고 나를 붙잡으면서도 지금 내 컨디션이 괜찮은지 계속 살피던 그였다. 그런 B가 건넨 말은 아픈 내가 뭐라도 먹고 빨리 나았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우러난 말이었다. 이렇게나 애정 어린 친구의 말을 지적하고 반박하기에 바빴다. 내가 옳다는 생각에 매이면 대화의 전체 맥락도, 핵심도 놓친다는 걸 깨달았다.
말하기와 듣기는 분리되지 않는다
내가 뱉은 말이 기준이 되는 순간부터 상대의 모든 말들을 그 기준에 맞춰 평가하고 판단하게 된다. 이제 결론은 둘밖에 없다. 상대의 말이 맞거나, 아님 틀리거나. 틀린 말은 언제고 한 번은 나올 테니, 대화가 곧 논쟁이 될 건 불 보듯 뻔하다. 기준이 없어야 논쟁도 사라진다.
내가 옳다는 기준이 강할수록 상대의 말을 잘 들을 수 없으니 이어지는 내 말은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 혼잣말이나 다름없다. 그때 상대는? 벽보고 말하는 느낌이 들겠지. ‘내 마음은 그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올라오면, 그도 억울한 마음에 자신을 항변하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논쟁에 동참하는 건 순식간이다. 말하기의 최고 경지가 ‘경청’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말하기와 듣기는 분리되지 않는다. 잘 들어야 잘 말할 수 있고 잘 말해야 내 뜻을 투명하게 전달할 수 있다. 그래서 잘 말하는지, 잘 듣는지 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잘 소통했는지’이다. 말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통했다면, 즉 대화를 통해 서로 교감했다면 그 대화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설령 상대가 먼저 논쟁을 시작했다 해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언제든 논쟁으로부터의 탈출구는 있다. 막힌 곳에서 다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내면 된다. B와의 대화에서도 논쟁에서 탈출해서 소통으로 갈 수 있는 길은 많았다. B에게 어머니의 경험을 더 들려달라고 청할 수도 있고, 날 걱정하는 마음이 느껴졌을 때 고마움을 전할 수도 있다. 그럼, B의 대답도 새로운 흐름을 탈 테고, 이내 우린 느꼈겠지. 논쟁의 긴장감에서 소통의 따뜻한 교감으로 대화의 기류가 바뀌고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