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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녕 Sep 07. 2021

직장인을 위한 싸움의 정석

차라투스트라에게 조언을 구한체크리스트

직장인은 회사가 ‘좋은 게 좋은’ 곳이어야 한다고 배운다. 회사의 인재상과 잘 맞는 직원을 뽑기 위해 보는 인성검사 문제만 봐도 알 수 있다, 상사가 부정한 방법을 사용한 사실을 알았다면, 상사와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다면, 사소한 일로 상사의 심기를 건드린 이후 상사가 무리한 업무로 괴롭히기 시작했다면? 이때 부하직원인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지 묻는 질문에 답은 제각각이 될 수 있지만, 원하는 건 하나다. 나 몰라라 넘어가서도 안되지만,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것. 서로 완만하게 합의하고 넘어가길 원한다. 감사팀으로 직행하거나 상사에게 대들어서 문제가 커지길 원치 않는다.


    상사와 부딪혔을 때 다른 사람이 내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좋게 좋게 잘 넘어가는데, 왜 혼자서 시끄럽게 만드냐’고.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피해를 입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하지만 마냥 참는 것도 답은 아닐 터. 언제 문제 제기해도 좋을지, 내 나름대로 점검할 수 있는 목록을 만들어보자. 아, 혼자서 만들기는 역부족이라, 전투에 일가견이 있는 차라투스트라(프리드리히 니체의 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주인공)에게 조언을 구했다.



점검① 나는 투덜대는 돼지인가?


나 너를 나의 투덜대는 돼지라고 부르노라. … 너를 애초에 투덜대게 만든 것, 그것은 무엇이었지? 그 누구도 네가 흡족해하리만큼 네게 아첨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렷다. 투덜댈 수 있는 구실을 많이 갖기 위해 너 이 오물에 주저앉았던 것이고. 또 허다한 앙갚음을 위한 구실을 갖기 위해! 너 허영심에 찬 어릿광대여, 나 너를 알아보았으니, 네가 입에 물고 있는 거품 모두가 앙갚음이렷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책세상, 294쪽)

     

    먼저, 내가 ‘투덜대는 돼지’인지, 아닌지 따져 봐야겠다. 이 짐승은 언제 어디서건 투덜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어떤 경험을 하든,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러니 툭하면 상대의 탓으로 돌리기 일쑤다. 상대가 자신이 듣기에 좋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인정받지 못했다는 식이다. 기억력이 좋아서 상대의 잘못을 먼 과거에서도 끄집어낼 수 있는 재주가 있다. 



    투덜대는 게 자신의 존재양식이 되어버린 사람은 시궁창인 곳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머문다. 다른 사람을 비하해야 자신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부심은 거짓이다. 남이 원하는 모습을 연기하며 얻은 부심이라, 허영심을 보기 좋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투덜대는 돼지’는 투덜댈수록 자신과 멀어진다. 그리고 남의 도움 없이(정확히는 남을 깔아뭉개지 않고) 스스로 높아지는 법도 알지 못한다.


    나, 회사에서 ‘투덜대는 돼지’인가? 내가 상대에게 하려는 건, 앙갚음인가? 그를 욕보이면서 나를 높이고 싶은 건가? 그렇다면 지금은 상대와 싸울 때가 아니다. 타인이 아닌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하자. 앙갚음으로부터 나를 구하기 위한 싸움을.



점검② 적이 경멸스러운 적인가?


1단계를 통과했다면, 이제 적을 알아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 적이 ‘경멸스러운 적’이라면 싸우지 않고 지나가는 게 최선의 전술이다.


한층 품격 있는 적을 위해 너희 자신을 아껴두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많은 사람 거들떠보지 말고 그냥 지나가야 할 것이다. 누구보다도 너희의 귀에다 대고 민중과 민중들에 관해 중언부언하는 허다한 잡것들은. 저들과의 이해관계에 휩쓸리지 말고 너희 눈을 깨끗이 지키도록 하라! (같은 책, 346쪽)

     

    경멸의 대상은 ‘민중’과 ‘잡것’이다. 모두 시장을 좋아하고 명성을 쫓는다. 민중은 질이 아닌 양, 다수가 좋아하는 것, 잡것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을 믿는다. 좋다고 믿는 근거가 무엇인지 따져볼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 그래서 쉽게 부와 명예, 쾌락을 좇는다. 많은 정치지도자, 학자, 기자들 역시 민중의 관심을 갈구하는 이들로, 민중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쓴다. 그들 역시 믿음의 근거를 파헤치고 사실을 알리는 데는 관심 없다. 


    스스로 가치를 평가하고 선택하지 못하는 자들은 경멸해야 할 적이다. 싸울게 아니라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그들의 숨겨진 정체를 알아차린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증오하는 게 아니라 경멸하면서 그냥 지나쳐야 그들과 똑같이 살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경멸하는 대상을 닮고 싶어 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싸우려고 한 대상이 민중이고, 잡것인가? 다수의 의견에 휩쓸려 행동하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싸움은 일찌감치 접자. 그들을 알아본 것만으로도 큰 성과다.



점검③ 모두가 성공하는 싸움인가?


적을 갖되, 경멸스러운 적이 아니라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만을 가져야 한다. 너희는 너희 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너희의 적의 성공이 곧 너희의 성공이 될 것이다. (같은 책, 77쪽)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 즉 품격을 갖춘 적을 만났다면, 이제 진짜 싸움을 벌일 때가 왔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은 어떤 적이지? 적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 되는 싸움, 그게 가능한가? 적이 실패해야 내가 성공하는 게 싸움의 법칙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보자. ‘경멸할 수 있는 적’을 만나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지니지 못했다면?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보자. 내가 바로 민중이라면? 잡것이라면? 이때는 싸울 수밖에 없다. 1, 2단계를 통과하고 3단계까지 왔으니, 스스로는 ‘난 투덜대는 돼지도, 민중도, 잡것도 아니야!’라며 뿌듯해하겠지만, 어찌 보면 1단계도 통과하지 못했을 수 있다. 스스로 ‘투덜대는 돼지’ 인지도 자각할 수 없다면, 정직하게 밀어붙여 싸우는 수밖에. 이때 만나는 적은 내 수준에 맞는 적, 즉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이다. 다시 말해 적이 내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뜻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건 남에게 복수하기 위한 싸움이거나 상대를 끌어내리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내 ‘인식의 싸움’이라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나, 내 약점이자 몰락할 지점을 알아내기 위한 싸움이자 또 하나의 ‘자기 극복’을 위한 싸움이다. 그래서 상대가 나를 이긴다 해도, 그건 내 승리이기도 하다. 왜? 상대의 승리로 난 민중 혹은 잡것의 옷을 한 꺼풀 벗을 수 있으니까. 반대로, 내가 이긴다면? 상대가 ‘자기 극복’의 운명을 마주하게 된다. 어느 쪽이든 ‘자기 극복’을 했다면, 그 영향은 상대에게도 미친다. 그래서 적은 가장 가까운 벗이기도 하다. 내가 성장하는 만큼 적도 함께 성장한다. 우리는 적의 성장을 기뻐할 수 있는 싸움, 더 강한 적을 만나길 바라는 싸움을 해야 한다.


* 출처 : 강홍구 기자, 「9분 35초 혈투 조구함, 승자 손 들어줘... '품격은 金'」, dongA.com, 2021.07.30


    편의상 단계를 나누긴 했지만, 인생은 3단계의 점검이 무한 반복된다는 걸 누구나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싸움은 자신을 만나고 극복하기 위해서만 벌여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누군가 내게 말한 것처럼 단지 '소란 피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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