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부조리'
직장인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불변의(?) 법칙이 하나 있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 어느 조직이나 또라이들이 일정한 비율로 반드시 존재한다는 말이다. 회사에서 날 힘들게 하는 사람 때문에 이직하고 싶다고 넋두리할라치면, 친구들 중 꼭 한 명은 이 법칙을 들먹이며 이직해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는 말로 내 입을 닫게 만든다. 그가 야박하단 마음이 들지만 어쩌겠나, 사실인걸. 실제로 이직한 곳마다 또라이를 만나기도 했고, 어떨 때는 더 막강한 또라이를 만나면서 예전 또라이가 그리워지는 웃픈 시절도 있었으니 친구의 냉정한 말에 수긍할 수밖에.
한때는 또라이가 한 명도 없는 회사를 꿈꿨다. 내가 일하고 있는 회사의 모든 이들이 일을 남에게 미루지도 않고 매사 적극적으로 임하면서도, 서로 존중하고 배려해주는 회사, 돈보다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회사이길 바랐다. 이 바람을 함께 인문학을 공부하던 스승과 도반들에게 얘기했더니, 스승이 물었다. “네가 그런 회사를 만들어봐. 근데 가능할까?”
지금이야 그때 내 생각이 참 순진했구나 하고 웃어넘기지만, 그때 당시에는 스승의 말에 꽤나 큰 충격을 받았었다. 그런 회사가 있을 수 있냐는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기에 더 그랬다. 당연히 이런 회사가 있어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비현실적이란 생각은 한 번도 못해봤다. 혼자 애써봤자 다른 사람들이 따라와 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기도 하고, 어딜 가나 부조리한 일들은 존재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부조리한 일들은 도처에 있다는 증거 중 하나가 ‘또라이 잘량 보존의 법칙’이 아닌가.
그래, 세상은 부조리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자. 근데, 그다음이 문제다. 이상적인 회사를 꿈꿀 땐 나부터 뭔가 나아지려고 하고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열정이라도 있었다. 그런데 부조리를 인정하고 나니 모든 게 멍~해졌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머릿속이 백지가 된 느낌이었다.
부조리는 절연이자 연결이다
나도 꽤나 답답했나 보다.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 검색 창에 ‘부조리, 철학’이라고 썼다. 꼭 부조리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주제로 오랜 시간 고민한 사상가가 있다면, 그 사람의 책이라도 펼쳐 봐야겠다 싶어서 한 검색이었다. 큰 기대는 없었는데 세상에나, 부조리 철학의 대가가 있을 줄이야!
알베르 카뮈, 이름이 낯익다. 『이방인』이라는 소설을 쓴 작가로 유명하다. 문학가인 줄만 알았는데 철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우리가 어떤 걸 부조리하다고 말할 때의 의미는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뜻이고, “그것은 모순”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8, 51~52쪽). 여기까지는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내게 부조리는 부당하고 불합리한 것이어서, 이치에 맞게 살아가려면 마땅히 척결해야 할 어떤 것이었다. 그러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바로잡아야 할 모순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뒤이어 나오는 카뮈의 냉철한 해석은 굉장히 낯설다.
그 어느 경우에든 부조리함은 두 항의 비교에서 생겨난다. 따라서 내가, 부조리의 감정은 어떤 사실 또는 인상에 대한 단순한 검토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사실과 일정한 실제 현실의 비교, 어떤 행동과 그것을 초월하는 세계의 비교에서 태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근거가 있다. 부조리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어떤 이혼, 즉 절연이다. 그것은 서로 비교되는 두 요소의 어느 한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조리는 그 둘의 대비에서 생겨난다. (같은 책, 52쪽)
카뮈는 부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두 항을 비교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담담하게 얘기한다. (부조리한 일들을 얘기할 때는 항상 열을 올리던 나와는 다르구나.) 내가 갖고 있던 사실, 이상적이라고 믿고 있던 세계와 실제 벌어지는 현실이 어긋났을 때 부조리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두 항이 반드시 함께 있어야만 부조리가 탄생한다니, 놀라운 해석이다.
세상에는 이미 부조리한 일들이 존재하고, 내가 그 일들을 발견한다고만 생각했다. 근데 그게 아니다. 내가 만들어 온 세계가 현실의 세계와 부딪혔을 때, 또 어긋났을 때 나타나는 게 부조리다. 그래서 카뮈는 부조리가 “이혼”이자 “절연”이면서도, 두 항을 “묶어 주는 유일한 끈”(같은 책, 53쪽)이라고 말한다. 두 항을 끊는데 또 이어준다고? 이게 무슨 말장난인가 싶지만, 사실 내 이상과 지금 살고 있는 세계가 똑같다고 느낄 때는 부조리하다고 느끼지 못할 테고, 두 항이 존재하는지도 알 길이 없다. 우리가 원하는 바가 현실과 다를 때만 부조리는 탄생한다. 두 항만 놓고 보면 이혼이고 절연이지만, 부조리까지 포함해서 세 항으로 바라보면 인간의 바람과 세계를 부조리가 연결해주고 있는 셈이다.
세계와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이라니, 뭔가 부조리가 우리에게 굉장히 고마운 존재가 된 것 같다. 하지만 부조리하다고 느낄 때 그 괴로움은 어쩌란 말인가. 적어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이 상황을 잘 헤쳐 나갈 돌파구 하나쯤은 마련해야 하지 않을까.
부조리를 살려야 나도 산다
어떤 경험, 어떤 운명을 살아 낸다는 것은 그것을 남김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의식에 의하여 백일하에 드러난 부조리를 자신의 눈앞에 지탱시키려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운명이 부조리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 그 운명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부조리는 대립에 의해 존재하는데 그 대립의 항목들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부조리를 기피하는 것이 된다. 의식적인 반항을 폐기하는 것은 곧 문제 자체를 폐기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항구적인 혁명이라는 주제는 개인적 경험 속으로 옮겨진다.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 놓는 것이다. (같은 책, 83쪽)
놀라움의 연속이다.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 놓는” 거라니! 내겐 계속 괴로워하라는 잔인한 말로 들린다. 가만, 카뮈에게는 부조리가 괴롭지 않은 건가. 아니면, 괴롭다 할지라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진실이라서 그렇게 말했을까.
일단 내가 왜 부조리를 괴로움으로 인식했는지 생각해봐야겠다. ‘이렇게 살아야지’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삶의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서로 존중하고 배려해주는 회사를 꿈꿀 때도 노력하다 보면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회사는 어디에도 없다는 게 현실이었다. 현실은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내가 현실을 보지 못하고 환상 속에서 살 때는 괴롭지 않다가, 어느 날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니 괴로웠다. 여기까지 살펴보니 괴롭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싹없어졌다. 현실을 맞닥뜨리지 않고 사는 건, 통증이 있는데도 계속 마취제를 맞아가며 사는 것과 같다. 그럼 이제 괴로워도 부조리와 함께 사는 길만 남았나? 우리에게 삶의 가치는 없어도 되나?
운명이 부조리하다는 말은 우리가 비합리적인 현실 속에서도 계속 뭔가를 열망하며 산다는 말이기도 하다. 만약 두 항 중 하나라도 없애려 한다면? 내 가치만 고수하려면 현실을 보지 않고 살아야 한다. 그럼 아무것도 열망하지 않고 비합리적인 현실을 받아들인다면? 그러기 위해선 더 고도의 작업이 필요하다. 증명되지 않은 개념들까지 동원해서 현실을 납득할만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고도의 작업이. 이렇게 비약하며 사는 건 자신의 환상 속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문제를 피하는 행동일 뿐이다.
카뮈는 부조리한 운명을 “남김없이 받아 들”이고, 부조리를 “눈앞에 지탱시키려고 최선을 다하”라고 조언한다. 한마디로 “의식적인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의 끊임없는 대면”이고, “어떤 불가능한 투명(透明)에의 요구”다(같은 책, 84쪽). 우리에게 자신의 열망과 비합리적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분명하게 주시하겠다는 태도로 사는 것만큼이나 가치 있는 일은 없다. 카뮈에게는 살면서 괴롭냐, 괴롭지 않냐가 중요하지 않았다. 부조리한 운명을 피하며 살 건지, 대면하며 살 건지가 중요했다.
부당한 관계 안에서 자유를 누리다
카뮈의 안내로 부조리의 진면목을 알게 된 뒤부터는 부당하다는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당장 저 사람을 어떻게 대할까,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느라 정신이 없고 괴롭다가도, 한편으로는 내 열망과 현실이 만났다는 증거이니 무조건 피하기보다 계속 주시해야 할 지점이라는 생각도 든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은 상대가 ‘절대적으로’ 또라이라는 전제를 담고 있다. 그 사람은 어딜 가도, 누구를 만나도 똑같은 행동을 할 거라는 믿음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실을 바탕으로 이름을 붙여보면, ‘부당한 관계 질량 보존의 법칙’ 정도가 되려나. ‘부당한 관계’는 나쁜 짓만 일삼는 관계라기보다는, 부당함을 만드는 두 명 이상의 관계라는 뜻이다. 내가 누군가를 보며 이 법칙을 떠올렸다면, 그가 절대적으로 또라이라서가 아니라, 나와 그가 만나 부조리가 생겨서다. 더 정확히는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그 가치로 바라봤을 때 비합리적이라 여겨지는 상대의 어떤 면이 만나 ‘부조리한 관계’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제 남 탓만 하긴 어려워졌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보는 시선을 나를 포함한 관계로 넓히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적어도 상대만 나쁘다고 비난하거나, 나만 옳다며 우기는 일은 피할 수 있다. 고백하자면, 나조차도 내가 만들어 놓은 가치, 신념을 여러 번 어겼다. 그럴 때마다 수없이 자책했다. 다친 엄마를 돌보느라 일에 집중할 수 없었을 때조차도.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세운 가치, 신념을 고수하는 게 삶을 의미 있게 사는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스스로에게 온갖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 나의 삶을 가두”(같은 책, 89쪽)게 된다. 내가 만들어 놓은 가치가 맞다는 보장은 어디 있나. 누군가 만들어 놓은 가치가 좋아 보였던 건 아닐까. 나도 누군가에겐 분명히 또라이라 불리고 있지 않을까. 그것도 슈퍼 울트라 막강한 또라이로. 부당한 관계를 살려 놓는 일은 가치판단이 아닌 부조리 그 자체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일이며, 울타리를 허물고 자기 자신에게 자유를 허하는 일이다. 어찌 보면 이 자유를 누리는 삶만이 의미 있다고도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