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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마니 Sep 23. 2024

'슬기로운 (난임) 부부생활'

은 뭘까?

매주 월요일 10주 간 글을 쓰고자 다짐했다. 하지만 여러 개인적 일들로 연재가 상당히 많이 늦어졌다. 그간의 일들은 핑곗거리밖에 되지 않겠으나 '완성 시간'을 어긴 대신 '완성'만큼은 지켜보고 싶다.


열 번째 난임일기 주제에 대한 고민이 참 많았다. 글감이 잘 떠오르지 않았고, 일상이 늘 그러하듯 비슷하게 흘러갔으니까 특별할 것들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일상에서 약간 바뀐 것들이 있었다.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인데 글감이 유독 없다 여겼던 이유를 생각해 봤더니 '운동'이 '독서'의 자리를 차지해 버린 일이 있었다. '운동'과 '독서' 얼마나 생산적이고 바람직한 취미이자 삶의 친구 같은 존재인가. 안타깝게도 이 둘은 나의 일상에서 사이좋게 자리를 나눠갖지를 못하고,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리듯 한쪽이 다른 쪽 자리를 완전히 내어줬다. 알 것 같다. 체력이 부족해서겠지. 그렇다면 '운동'이 '독서' 시간을 가져가고, 공존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이 가능하다. 아 그렇다면 이제 체력이 조금 올라왔는가 본데? 나는 잊어버릴 뻔했던 도서관 바로 옆 카페의 원두맛을 일깨우듯 독서 습관도 다시 가져오기 시작했다(대신 운동은 습관 형성에 성공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까마득해진 느낌이다-나는 100일 연속으로 하루 90분 이상 유산소 운동을 해냈었다).


아주 오랜만에 책냄새를 맡으며 비 오는 날 카페에 앉아 좋아하는 카페 라떼도 음미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만은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나를 흠뻑 적셔주기를 참 좋아라 한다.


책의 주요 내용과는 거리가 있지만 작가가 남편과 경험한 일화 중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부분이 있었다. 미국인 작가는 영국인 남편과 프랑스 파리에서 살고 있는 다문화 가정의 외국인이다. 만삭의 작가는 양수가 터져 분만실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남편에게 물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느냐고. 남편은 무덤덤하게 말했다고 한다. "아르헨티나 축구" (--책을 반납한 후 이 글을 쓰고 있어서 정확한 남편의 대사(?)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나라의 축구중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화에서 남편의 메마른 감성은 정점을 찍어주는 듯했다. 분만실로 들어가 20분 만에 아기를 낳고 돌아온 작가의 곁에 남편이 없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초산인 와이프의 분만이 더 오래 걸릴 줄로만 알고, 크루아상을 사 먹으러 다녀온 것이다.


자, 적어도 나는 뜨악했다. 그리고 내가 작가였다면 몹시도 서운했을 것 같았다. 물론 이 작가도 황당해하는 뉘앙스를 풍겼지만 이런 남편에게 어느 정도 면역반응은 획득한 듯 특별한 심리적인 타격 영향을 받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차근차근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았다. 서운할 수는 있다. 내가 느끼는 감정반응이란 것은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특이하건 비특이하건 간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감정을 느끼는 일은 어떠한 순간에도 어떠한 곳에서도 누구에게도 존중받아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내가 뜨악하고 서운한 감정을 느꼈을지라도 이런 감정과 생각을 상대방에게 강요하거나 불을 옮겨 지피는 행위는 정당하지 못하다. 내 마음속 감정 반응이 '불'이 난 것이라면 '진화'는 남편이라 아니라 '나 자신'이 해야만 한다.

나는 왜 뜨악하고 서운한 감정을 남편에게 가졌을 것일까? 내가 남편에게 실망하고 서운해했다면 기대한 남편의 반응이 있었을 것이다. 남편에게 나는 무엇을 기대했나? 내가 분만실로 들어갔을 때 발을 동동거리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기대했는가 본데? 발톱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손톱을 물어뜯으며 전전긍긍해하고, 초조해하며 다른 일에는 집중할 수 없는 불안에 압도된 남편을 상상했던가? 빵사먹으러 나가는 남편보다는 불안에 떠는 남편이 자상한 남편의 '상'일까? 이 대목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결국 간사한 인간임을 다시 한번 느꼈다.

평소 남편은 직장 스트레스로 불안, 초조감을 토로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럴 때 나는 '저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을', '예민한 반응인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내가 막상 분만 상황에서 초조해하는 남편을 바란다고? 평소 남편에게 이성적이고 사리판단을 완벽하리만큼 하길 바랐던 내가 초조해하길 기대하며 내가 기대한 만큼 불안해하지 않았다고 남편을 야박하게 여겼을 것이라 생각하니 소름이 돋기도 했다.


슬기로운 부부생활은 어떤 것일까.

상대방이 느끼는 고유한 감정을 우리는 적어도 나는 온전히 존중해주고 있는 것인가?

남편이 느낄 감정 반응만큼은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되는 영역이다. 함부로 감정 반응을 강요하는 권리는 어디에서 온다는 것일까?

우리는 상대방의 행동이 아니라 적어도 당신이 느낄 감정 영역에서만큼이라도 충분히 인정하고 거리를 둬야만 하는 것 같다.


슬기로운 부부생활, 슬기로운 난임생활, 슬기로운 직업생활, 인간과 엮이는 생활 속에서 한 번쯤 돌이켜볼 만한 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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