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한 호수 위에 조용히 떠있는 배와 같은 나날입니다. 그저 바람이 불기를 망연히 기다리다 바람에 떠밀려 어느 뭍에 닿기를 바라는 의욕 없는 뱃사공의 마음입니다. 때로 마주하는 풍랑이 반가워 울렁이는 가슴 부여잡고 지나간 날들을 톺아보는 일이 제 일상입니다.
달달한 설탕과 씁쓰레한 소다의 맛이 어우러진 달고나 커피가 마시고 싶어 오늘은 잠시 카페에 다녀왔습니다. 적지 않은 가격에 흠칫 놀랐지만 커피를 받아 마시며 가격에 어울리는 미소가 얼굴에 잠시 피었습니다. 마스크와 소독제가 나의 일부가 된 요즘에는 잠시 나가는 일에도 꼭 필요한 일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한참의 흠칫 후에 나온 오늘이 참 만족스럽습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꽤나 즐겁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두운 채도와 나무 가구들로 가득한 카페는 어느새 사람이 가득합니다. 나를 둘러싼 책들을 한참 바라보다 겨우 가져온 책을 꺼냈습니다. 『제5 도살장』. 커트 보니것의 소설입니다. 조만간 있을 독서모임 도서입니다. 반전(反戰)을 말하는 소설입니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무거워질 수 있는 소설에 위트 있는 유머를 활용하여 보니것 만의 문체로 거침없이 직진하는 이 도서가 조금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뭐 그런 거지 뭐.
조금 늦을 것 같다는 당신의 문자를 보며 조금은 책을 더 읽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야금야금 책을 펼치는 저에겐 이런 작은 빈틈의 시간이 조금 반가울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랬습니다. 물론 당신을 조금 늦게 보게 되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요. 잠시 책에 빠져있자 당신이 제 앞에 웃으며 나타났습니다. 마주친 눈빛과 함께 웃어보는 우리가 필 듯 말 듯 입을 오므린 튤립 같단 생각을 했습니다. 당신이 둘러맨 가방을 갑자기 제게 내밀었습니다. 지퍼 사이 곧게 삐져나온 꽃다발을 가져가라 말했습니다. 주황빛으로 잘 오므려진 튤립 한 송이와 꽃잎이 힘차게 핀 나리꽃 비슷한 두 송이로 이루어진 꽃다발이었습니다.
방금 떠올린 튤립이 실제로 내 눈앞에 놓이자 커진 눈동자는 좀처럼 작아지지 않았습니다. 꽃을 건네는 당신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작은 리듬을 이루며 움직이는 제 흥겨운 작은 몸짓도 멈추질 않았습니다. 오늘 밖에 나오길 정말 잘했구나 생각했습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은 쏜 화살처럼 곧고 빠르게 지나갑니다. 사소하고 가벼워서 어디 담기기 어려울 이야기들이 쌓여 우리를 이룹니다. 사소해서 소중하고 가벼워서 두 손 가득 움켜쥐는 당신과의 시간이 참 좋습니다.
튤립. 튤립. 튤립. 소리 내어 발음해봅니다. 생각보다 명확하게 소리 나지 않는 발음이 웃겨 미소가 지어집니다. 저 멀리 지는 태양의 색과 비슷한 오늘의 튤립. 『제5 도살장』 표지 그림 색과도 비슷한 듯한 당신의 튤립. 반전(反戰) 말하는 책은 우리 앞의 놓일지도 모르는 전쟁을 잠식시켜주는 듯합니다. 문득 궁금해 튤립의 꽃말을 검색해봅니다. ‘사랑의 고백, 매혹, 영원한 애정, 경솔’이라고 합니다.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리는 단어들의 나열을 보며 튤립, 하고 소리를 다시 내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