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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단단 May 06. 2021

윤여정이 말한 '최중'의 진짜 의미

'최중'을 생각하다

"우리 다 같이 최고 말고 최중하면 안 돼요?"


최근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여우조연상을 거머쥔 윤여정 선생님이 '지금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냐'라고 물은 기자의 질문에 한 대답이다.


"저는 '1등', '최고'라는 말이 싫어요. 저보고 '경쟁 싫어한다', '1등 되는 거 안 중요하다' 그런 거 말하지 말라 그러는데, 그냥 같이 살면 안 돼요? 최고의 순간인지 모르겠고 아카데미가 전부는 아니잖아요. 최고가 아니라 다 같이 최중만 되면 안 돼요?"


윤여정 선생님에게서 '최중'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말이었다. 아니 누구도 생각하지 않던 말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말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최(最)라는 말은 '가장'이라는 뜻으로 극단을 말하는 말인데, 높이의 개념에서 고와 저 이외에 이 단어가 수식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 모두가 가장 중간에 있자'는 말인데 윤여정 선생님도 순간 프로불편러들을 의식하신 건지 웃으면서 마지막에 한 마디 던지신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사회주의자가 되나?"




윤여정 선생님의 '최중'은 단순 언어유희였다. 최고가 아닌 중간이더라도 다 같이 행복하면 안 되겠냐는 말인데 '최'를 붙여 말을 재치 있게 하신 것이다. 윤여정 선생님의 재치 있는 언어유희 덕에 우리는 더욱 신선하게 말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옛날 유행하던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코미디 프로그램 시절에서 많이 나아가지 못한 우리 사회는 '최중' 수상 소감에 통쾌함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자주 쓰는 단어는 아니지만 사실 '최중'이라는 단어는 이미 있는 말이다. 이 최중의 '중'은 윤여정 선생님이 말한 중간을 의미하는 중(中)자는 아니고 중요하다는 의미의 중(重)자다.


최중하다 : 가장 귀하고 중요하다


이 뜻풀이를 확인하고 조금 놀랐다. 의도하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중의적인 의미까지 담고 있는 소감이었다. 윤여정 선생님의 최중을 이 단어로 바꿔서 생각해봐도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대로 전달된다.


'우리 최고 그런 거 하지 말고, 다 같이 가장 귀하고 중요하면 안 돼요?'




나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막둥이 동생이 있다. 지금 고3이다. 입시를 앞둔 동생에게는 성적 순서가 곧 좋은 대학 입학의 순서이자 성공의 순서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막내 동생이 말했다.


"서연고 서성한은 아니더라도 친구들은 중경외시 지원한다 만다 얘기하는데 나는 중경외시는 커녕... 하..."


20년 전에 떠돌던 대학 서열 용어를 동생 입에서 들으니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하, 무엇부터 말을 해줘야 하나... 나도 고3 때는 뭇사람들이 얘기하는 저런 학교 서열이 다인 줄 알았으니, 동생이 이렇게 말하는 게 이해는 갔다. 그래도 너무도 새싹인 고등학생이 이게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듯해서 해주고 싶은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지금은 대학이 곧 인생 성공의 순서라고 생각이 들겠지만,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 지금은 다 같이 똑같은 교복 입고 똑같이 수능을 보니까 같아 보이지만 사회 나오면 각자 얼마나 다른 삶을 살게 되는데. 나무랑 비슷해. 나무가 하나의 기둥이지만 수백 개의 나뭇가지로 갈라지고 수천 개의 줄기로 갈라지는 것처럼 어른이 되어 가며 서로 다른 세상에서 다양하게 살게 돼. 그런 줄세우기가 잘 되지도 않아. 누구나 노력하면 각자의 삶에서 충분히 중요하고 멋진 삶을 살 수 있어."


동생이 거실 구석 한쪽을 멍하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니 내가 너무 길게 말한 듯 하다. 사실 동생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윤여정 선생님의 '최중' 수상 소감에 우리 사회가 감명받는 것을 보면 '모두가 경쟁 사회 속에서 계단을 오르느라 매우 지쳐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고 무한 경쟁 사회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라고 믿고 사는 건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보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최고가 아니더라도 귀하고 중요할 수 있는 세상이 있다. 내가 애써 부인하면 만날 수 없는 세상이고, 내가 그런 세상을 보려고 한다면 만날 수 있는 세상이다.


우리 모두 최중에서 최중하면 안 돼요?


윤여정 선생님의 질문에 각자가 답을 생각해 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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