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악 자체도 당신의 전 생애를 놓고 보았을 때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당신을 빚고 당신의 생애에 의미를 부여하실 수 있다.
-상한 감정의 치유-
긴 방황을 끝내고 교회로 돌아오게 됐을 땐 정말 툭 치면 또르르 눈물이 흘렀다. 오래도록 인사치레만 했던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 잘 계시냐고 안부를 물었더니 '무슨 일 있냐'하는 말씀에 통곡하며 넘어가는 숨 반 말 반으로 내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그걸 죄로 알게 하신 것 자체가 은혜라고 말씀하시며 응원해주셨다. 새로 옮긴 교회의 목사님도 얘기를 들으시곤 하나님께서 너를 너무 사랑하시는 게 느껴진다며 위로하셨고 청년부 담당 목사님도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있을 거라며 앞으로 걸어가야 할 방향을 잡아 주셨다.
세 분 다 하나같이 말씀하셨던 건 하나님께 집중하라는 것이었다. 죄에서 다시 멀어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하시며 오직 하나님과 더 가까이 지내려 노력하라고 하셨다. 용기를 얻고 묵묵히 해내고 있었는데 변화는 생각보다 더뎠다. 내 생 어느 때보다 하나님을 위해 할애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뭘 더 해야 하나 싶어 참담했다. 그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제대로 기도할 수 있었을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울증에 걸린다는 게 참으로 부끄러웠던 건 하나님께서 하시는 대표적인 일이 평안을 주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변 그 누구도 정죄하지 않으나 홀로 정죄하며 더 깊이 침전했다. 세상 그 누구도 주지 못했던 사랑을 자격도 없는 내게 주시는 하나님을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정서적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탓에 내가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도할수록 고쳐졌다. 인간인 내가 완벽을 바라는 것 자체가 교만이다.
힘들었던 기간 동안 부모님과 참 많은 얘기를 나눴었다. 나이를 먹고 아버지를 용서했다고 생각했지만 위태롭게 숨어 있던 분노들은 상주하고 있었던 건지 우울증이 찾아 오자 본색을 들어냈다. 내 얘기를 전해야겠다는 용기가 셈 솟았다. 발악이라고 하는 게 맞을 수도 있고.
내가 아버지께 듣고 싶었던 말은 '참 수고했다' 그 한마디였다. 그들의 트로피가 되길 자처하면서도 칭찬 한 번 듣지 못했던 것에 안타까워할 겨를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부담감도 버거웠다.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이 좀 화목해서 엄마가 울지 않을까. 그 고민이 내 청소년기에 행했던 모든 행실의 동기가 됐다.
그전에 이 서적을 읽어본 적 없었음에도 나는 상처를 관찰하고 치유하는 과정에 자연스럽게 이끌림 받고 있었다. 목사님과 내 죄를 공유하고 아픔의 근원을 찾고 치유받는 것, '상한 감정의 치유'에서 제시하는 방법을 나도 모르게 따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되돌아보면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이었는데 나는 당연한 듯 시간이 한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
현재는 본 서적을 읽으며 나의 또 다른 문제와 그 원인을 고민하게 됐다. 내 속에 내가 많다고는 알고 있었으나 왜 욕구를 충족할 수 없는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지 탐구하며 해답을 구하는 중이다. 해결할 수 있을까, 기도가 막막하다. 너무 큰 문제인 거 같은 마음에 살짝 쫀 거다. 그래도 여즉 그래 왔듯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하며 조금 마음 편하게 있어 보려고 한다. 마땅한 기도제목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서 기도가 안 되지만 도우심을 구하다 보면 뭐라도 알려 주시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