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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Nov 17. 2022

이 수업은 너를 위한 수업

'안돼'를 읽고

 진영이는 감당하기 힘든 장난기를 소유하고 있다. 6학년 교실에 앉아 있으나 하는 행동이나 체구를 보면 영락없이 4학년이다. 3월 이후 지금까지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진영이 이름을 부르지 않은 날이 없다. 이름이 닳는다면 진영이의 이름은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에 구멍이 뻥 뚫린 돌멩이 같으리.

 정색하기도 하고 잘 타일러 보기도 하고 애원하기도 해 봤으나 넘치는 에너지를 통제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사실 나는 진영이가 춤을 추며 난리 부르스라도 문제없다. 교실에 나와 걔만 있다면. 피해를 보는 친구들의 원성을 들을 때면 뻔뻔한 진영이 대신 내가 낯부끄럽다. 이제는 진영이가 움찔하기만 해도 다들 내 이름을 부르며 중재를 요청하는 수준이다. 그러면서도 막상 결석이라도 하는 날에는 진영이가 없으니 심심하다는 앙증맞은 소리를 해댄다.

 규칙이나 약속 따위가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내가 기댈 수 있는 게 그런 하찮은 말들 뿐이라 늦은 감은 있지만 '안돼'라는 책을 들었다. 나와 이 교실을 지나친 장난에서부터 구원해줄 동아줄이라 여기며 지도안을 짰다. 사회적 규범을 지키지 않은 일화들을 소개하며 함께 규범에 대해 얘기하는 것으로 수업이 시작된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친구가 문이란 문은 모두 허락 없이 여는 상황, 정용진 부회장 가정의 식사 예절에 대해 생각을 나누며 규범이란 무엇이고 지켜야 하는 이유에 대해 토의했다.


 책 속 주인공(강아지)은 흙이 잔뜩 묻은 채 침대에 올라간다거나 식탁의 음식을 탐낸다거나 신문지를 물어뜯는다. 주인은 연신 '안 돼!'하고 소리를 지르지만 강아지는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주인이 기뻐서 제 이름을 불러요.' 같은 식의 상황이 낯익다. 마지막 장에선 강아지가 자신의 이름표를 보며 한숨을 쉬어댄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의 이름(안돼)이 아닌 다른 이름이 적혀 있다는데 그 이름이 뭘 거 같냐고 물으니 아이들도 단박에 정답을 말했다.

 낭독을 하면서 진영이를 일별했다. 처음엔 관심이 좀 있는 듯하더니 제 얘기를 하는 걸 아는 건지 조금 풀이 죽어 있었다. 아무렴 교사는 수업으로 말해야지.

 독서가 끝나고 간단히 내용 정리를 한 뒤 우리 반 뭉치(강아지의 실제 이름) 규범을 만들어 보았다. 학급 규칙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너무 기본적인 사항들만 약속되어 있어 그저 종이 쪼가리에 불가했다. 7개월 동안의 생활을 바탕으로 우리 반을 더 평화롭게 만들 수 있는 진짜 규범을 만들자며, 자신이 평소에 불편한 시선으로 봤던 것과 자주 지적받았던 것들을 보드에 한 가지씩 쓰게 했다. 그다음 모둠에서 '~않기' 보다는 '~하기'를 사용해 두 가지 규범을 만들어 보게 했다. 마지막으로 모둠 토의 결과로 여러 규범들을 범주화하고 뭉치 규범을 만들었다. 뭉치 규범을 만들고 나서보니 다들 학기 초에 비해 모든 면에서 발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영이도 어느 정도 친구들의 눈치라는 걸 보기 시작했고. 진영이나 나나 분명 투닥거리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배웠을 것이다. 다만 배움이 더딜 뿐.

 누구를 처벌하기 위해 만드는 게 아니라 더 나은, 더 평화로운 우리 반을 위해 만드는 것이니 벌이 아니라 상을 주겠다고 말했더니 여기저기서 원하는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수많은 의견이 있었으나 역시 상으로 적당한 건 딱 하나다. 돈도 안 들고 동기 부여도 되고 반 전체를 대상으로 보상할 수 있는, 자유 시간.

 "매일 일과를 끝낼 때 자신의 양심에 손을 얹고 우리 반 뭉치 규범을 잘 지켰는지 물을게. 모두 다 잘 지켰다고 얘기하면 도장을 하나 찍을 거야. 도장 10개가 모이면 자유 시간이야."


 수업을 하고 사흘이 지났다. 모두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체제라 도장 찍는 걸 계속 깜빡한다. 역시 미숙하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잘해보자고 만든 규칙인데 까마귀 고기를 먹은 건지 종례 후에는 보내기 바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좀 치사한 거 같기도 하다. 나는 뭐 얼마나 잘났다고 그렇게 닦달을 하며 발전을 운운하는지. 나조차도 임용 후에는 어딘가 편안한 곳에 안주하며 쉬엄쉬엄 유유자적하는 주제에.

 일단 올해 시범적으로 운영해 보고 내년엔 개인 보상, 단체 보상 등을 더 세분화해야겠다. 지도안도. 일주일에 동화책 지도안 하나를 짜야겠다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랴부랴 날림으로 했더니 수업 흐름이 엉망이다. 내 자산이 될 지도안이니 하기 전에도 수정, 하고 나서도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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