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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Dec 05. 2022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바통 터치 좀 합시다

 무기력하다. 수업하면서도 온몸이 찌뿌둥한 게 의욕도 없고 누워서 쉬고 싶다. 3년 내내 원하던 것을 마침내 쟁취했으나 기분이 썩 상쾌하진 않다. 여유로운 오후를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는데 삶을 활기차게 하는 건 바쁜 업무일 수도 있겠다. 기운 빠진 내 모습을 보며 여기저기서 훈수를 두기로는 학교를 옮기는 해라서 그렇단다. 나는 오늘도 내 마음을 돌볼 생각은 하지 않고 그러려니 하고 우습게 듣고 넘겼다. 다음에 어떤 뒷감당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덜 고민하고 덜 치열하고 싶어서.

 아무리 세어도 하루에 두 개씩 줄어드는 게 아닐 텐데 시간이 날 때마다 방학이 얼마나 남았는지 확인한다. 휴일까지 모두 합쳐도 한 달이 안 남았으니 오늘에서야 희망적이다. 그러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맘때쯤이면 무기력했던 거 같아 만성적인 증상이 아닐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욕심이 문제다. 그렇게 잔소리하고 회유해 보고 무섭게도 해 보지만 아이들은 변하지 않는다. 내가 세운 나름의 기준이 평균이라고 믿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는 아이들을 끌어올리려 노력했던 건 누구의 비판처럼 동그란 걸 네모로 자르는 과정은 아니었던지 반성해 본다. 그럼에도 역시 장난으로라도 주먹이 먼저 나가는 것과 자신에겐 관대하고 남에겐 야박한 몇몇 을 보고 있자면 그들의 앞날이 걱정스럽다. 돌이켜 보면 어느 것 하나 내 어릴적 모습이 아닌 게 없는데도 말이다.

 학생들에게 잔소리하고 나면 어딘가에서 불쑥 이런 질문이 들린다.

 '너는 어땠는데?'

 맞다. 나도 그랬다. 내 선에서 해결할 수 없이 얄미운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을 벌주는 방법 중 담임 선생님께 고자질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고 통쾌했다. 실은 내가 먼저 시작하기도 한 장난이고 나도 같이 즐긴 장난이지만 끝이 깔끔하지 않을 땐, 정확하게는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땐 '선생님!' 이 한마디가 해결책이었다.

 그 유치했던 날들을 떠올리고 나면 무기력한 목소리로 잔소리한 게, 아이들을 위한다는 변명으로 지리멸렬한 소리를 해댄 게 미안해진다.

 "그래 선생님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얘들아,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닌데. 이제 우리 좀 성장해야 하지 않겠나?"


 그런 말이 먹히지 않는 기준이는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아이다. 준수나 준석이도 만만치 않으나 기준이와는 또 다른 영역이긴 하다. 기준이는 그러니까, 가정에서도 사랑을 통 먹지 못해서 나에게라도 긴급 처방을 받아야 하는 수준이다. 불행하게도 내가 그런 학생과 안 맞다. 마음이 불안해서 변화가 더디고 상처가 많아 뾰족한 건데 내가 그 어리광에 학을 뗀다. 나도 하여튼 6학년에 거는 기대가 너무 큰 게 탈이다.

 하루는 기준이가 별 대수롭지도 않은 걸 문제 삼길래 언발의 오줌 누는 격으로 해결해 줬더니 수업 시간에 불쑥 내 옆으로 와선 '그럼 이제부터 나도 사과는 성의 없이 해야겠다' 하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맹세코 그런 문제로 고함을 지른 적이 없었으나 그때는 정말 '으아아아아아아' 하고 내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뒷목이 싸늘해지고 심장은 거세게 뛰는데 한숨을 아주 몰아쉬지 않으면 못 볼 꼴을 보여줄 것 같아 냉큼 심호흡을 했다. 그날 처음으로 학생들에게 자유 시간을 주고 수업 시간을 이용해 기준이와 아주 길게 상담했다.

 처음에는 내가 일방적으로 기준이를 야단치는 형식이었다. 네가 얼마나 안하무인하고 자가당착인지 설명해 주며 기준이를 마구 할퀴어댔다. 현실을 일깨워 주는 거도 내가 해야 할 일이라 여기며. 그러나 그 방식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던가. 나는 한참을 혼자 떠들다 기준이에게 네 생각은 어떻냐며 바통을 넘겼다. 기준이는 침묵하다 더듬더듬 낱말을 뱉으려 했다. 결국 몇 개의 모음과 자음이 눈물과 함께 투두둑 바닥으로 흩어졌다. 기준이는 호흡을 가쁘게 쉬었다. 못난 담임 선생님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기보다는 어떤 쾌감이 들었다. 한 해 동안 꾹꾹 눌러 참기도 하고 에둘러 표현하기도 했는데 드디어 말이 좀 통하는 거 같아서.

 그리고 우린 한참 동안 더 얘기했다. 나는 먼저 기준이에게 사과했다. 선생님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너무 몰아세워서 미안하다고. 기준이는 가만히 들으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나는 물 한 잔과 휴지를 주며 기준이에게 시간을 주었다. 기준이가 말할 수 있을 만큼 침착해 지자 우린 얘기를 이어나갔다. 우리의 결론은 이랬다. 매일 아침 선생님이랑 같이 거울 보면서 5초 동안 웃어 보기로, 내가 기준이에게 칭찬 하나, 기준이는 스스로에게 칭찬 하나씩 해보기로 했다. 무슨 뜬금없는 맥락인가 싶지만 우리의 대화가 그랬다. 결국 기준이는 다른 어떤 게 아니라 상처받고 외로운 어린아이였으니까.


 방학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가 유독 지쳤었던가? 아니, 작년도 재작년도 똑같이 힘들었다. 올해와 예전은 내가 현재 겪고 있냐 아니냐는 것 외에 차이가 없다.

 이맘때가 되면 괜히 우울하다. 아이들에게 매번 감정은 소모되다 사라지지만 기억은 남는 거라고 얘기하는데, 나는 내가 가르치는 것과 다르게 지금 겪는 이 감정에 얼마나 허우적대고 지배당했던가. 본래 물에 빠졌을 때도 침착하게 몸에 힘을 빼고 새우등 영법으로 물 위에 뜨는 게 우선이다. 그리고 고개를 빠르게 들었다 내리며 뻐끔뻐끔 짧은 숨을 쉬는 동안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일상을 지키고 있다. 우울증에 걸렸을 땐 감정을 느끼는 벽이 낮아지고 예민해져서 울적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학생들에게 하는 얘기를 곱씹어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우울증에도 다양한 형태가 있을 테지만 어떤 우울증은 제대로 느끼지 않아서 생기지 않을까. 조금 쉬어가며 우울감에 흠뻑 젖어 우울을 소비할 때인가 싶다. 헛소리를 해대는 거 보니 방학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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