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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yu Apr 28. 2023

절연

우리가 휩쓸려 살아가는 이 시대를 잘 압축해 표현할 수 있는 단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절연-


 어느 순간부터 소설 속 배경이 내가 아는 문화권이 아니면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에게 당연한 것들이 내겐 물음표가 되기도 했으니 영미권 내지는 국내와 일본 소설이 아닌 이상 잘 읽지 않았다. 중국, 동남아 등 다양한 아시아권 문학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내겐 소설이 다른 삶을 경험하는 용도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편식이었다. 도서 장르는 잡식이나 감정에 있어서 만큼은 편협적이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자발적으로 들어가는 길이 꽤나 지루하다고 느꼈다. 

 단편 소설이 최근 들어 매력적인 이유도 거기 있었다. 지루함.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불편한 편의점, 아버지의 해방 일지 등 여러 소설이 비슷한 구조로 출판됐고 짧은 이야기가 결말에 하나로 연결되는 이야기의 특장점이 있다면 지루할 새가 없다는 것이었다. 사건을 길게 끌고 가는 플롯이 흥미로우려면 우선 티브이나 소셜 미디어에 등장하는 자극적인 콘텐츠와 범죄 사건들이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시간 낭비에 대한 걱정도 한 몫한다고 본다. 공들여 읽은 소설이 알고 보면 재미가 없을 때, 나는 의연하게 책을 덮지 못하는 편이다. 쏟아지는 잠을 이겨서라도 끝까지 읽어야 성에 찬다. 그래서 흠뻑 젖고 싶은 날에는 차라리 단편 소설을 문예지에서 골라 읽는다.


 각 지역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쓴 소설을 읽으며 나는 소설 편협을 이끄는 가해자가 아니라 편협을 강요당한 피해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자막이 있는 영화는 도통 보지 않는다는 미국인처럼 다른 나라의 문학은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편견은 경험에서 온 것이었다. 그저 그 한 작품이 나와 맞지 않는 것이었는데. 또 서사 구조나 문화 이해 부족이 아니라 번역체가 문제였을 수도 있는 건데.

 아시아 각지는 다양한 단절로 골머리를 앓는 듯했다. 각 나라에 만연한 문제들은 오히려 SF 판타지 같은 느낌이 있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가 펼쳐진 곳이 지구가 아닌 것만 같았다. 반대로 지극히 한국스러운 문제를 겪는 곳도 보여 동병상련했다. 그러니까 이제 한국스럽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고 세계적인 문제가 돼버린 고용난과 갑질, 어디나 또라이는 존재한다.


 한창 대선이 치러지던 일 년 전, 양 당에서는 하나가 되기를 강조했다. 나는 그걸 보며 친구에게,

 "왜 꼭 하나가 돼야 해?"

 하고 질문했는데 친구도 글쎄 하고 말았다. 하나가 된다는 건 지극히 폭력적인 결말 아니었던가. 화합, 융화 같은 말도 있는데 왜 하필 하나가 되고자 했을까. 그 슬로건의 뻔한 결말은 예상했다. 현재 양당은 눈도 감고 귀도 막고 하나가 되려고는 하는데 그게 꼭 자신의 색이어야 하니까.

 '시인의 밥상'이라는 책에서 이런 글귀를 읽은 적이 있다.

 '우리는 서로가 모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제자리에서 충분히 존재했다.'


 미술 시간에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활동이 있다면 노동이다. 체력이 필요한 미술 활동, 지루한 반복의 연속인 활동은 아무래도 좀이 쑤셔 못 참나 보다. 대표적인 게 점묘화다. 점묘화의 대가 쇠라는 점을 콕콕 찍었지 꾸우욱 눌러 찍지는 않았다고 한다. 콕콕 찍어 드넓은 캔버스를 채우려면 속이 터질 것 같은데 대단한 인내심이다. 어쨌든 그 결과물의 오묘한 느낌을 쇠라는 잃고 싶지 않았나 보다. 작은 점들이 모여 다른 색을 내고 형태를 내는 그 찬란한 그림 한 점을 포기할 수 없었던 쇠라는 노년이 아주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아무렴 관절이나 눈이 남아날 리가. 작은 캔버스 하나 채우는데도 그런 노력이 필요한데, 아무렴 한반도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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