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Gyu Aug 12. 2023

서울

 서울 부산이 아무리 가까워졌다지만 KTX를 매번 결제하는 일도 돈이 만만치 않다. 1월에 동기 결혼식에 맞춰 후다닥 올라갔다 뭐에 쫓기듯 내려온 걸 제외하면 순전히 놀기 위해 간 것도 3년 만이다. 기록적인 폭염이라는 뉴스에 최대한 가벼운 차림, 가벼운 짐으로 서울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부산역으로 향했다.

 푸른색 트레이닝 반바지에 하얀 티셔츠는 서울에 가는 복장이라기 보단 부산으로 오는 복장에 가까웠다. 동기들과 약속한 날보다 하루 일찍 올라온 나는 잠실행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안은 멋쟁이들로 가득했다. 큰맘 먹고 산 하얀 티셔츠가 빳빳했다면 덜 창피했을 거다. 아침에 커피를 쏟는 바람에 자국을 지운다고 거의 빨다시피 했다. 덜 마른 채로 입고 나와 찻간에서 말렸더니 주름이 져 눈치 없이 MT 다녀온 고학번 선배 차림이 됐다.

 떠들썩한 서울의 볕을 처음 마주한 게 '석촌역'이었다. SNS에서 유명한 디저트 카페로 향하는 길엔 제대로 된 그늘하나 없었지만 쉴 생각도 없었다. 행여나 줄을 길게 서야 할까 염려하며 걸었는데 다행히 무성한 소문에 비해 줄은 없었다. 원하는 만큼 고민하다 케이크 하나를 샀다. 얼그레이 파운드케이크와 흑임자 약과 쿠키가 든 종이 가방은 쳐다보고만 있어도 든든하고 배불렀다.

 한참을 고민하다 광화문으로 향하는데 역시 TPO가 맞지 않는 거 같아 커뮤니티에 글을 올렸다.

 '검은 옷은 아닌데 집회에 참석해도 될까요?'

 동료 선생님들의 응원 메시지가 답글로 달렸다. 나는 조금 자신만만한 태도로 지하철에 올라탔는데 허름한 차림의 남성 몇이 눈에 띄었다. 여유로운 회색 트레이닝 반바지에 무채색 티셔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가 비슷했고 내 복장의 문제가 '트레이닝 복'이 아니라 '색'에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러니까 무채색 도시에 지나치게 즐거운 색상을 더한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영락없이 이방인이 된 나는 문득 불안했다. 창피함의 실체였다.

 광화문에서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검은 옷차림이었다. 나는 얼른 피켓을 받아 손에 꼭 쥐었다. 피켓으로 부채질을 하거나 눈 부신 척 작은 차양을 만들고 걸어 다녔다. 검은 옷차림의 인파에 속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보였다. 마침내 4 구역에라도 앉게 됐을 때 나는 조용히 안도했다. 검은 옷 속에서 하얀 티셔츠는 더 새하얗게 반짝였겠지만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한 자리를 차지한 느낌이었다. 초대받았든 불청객이든.

 '저는 당감초등학교 5학년 2반 윤지후입니다. 저희 가족은 엄마 아빠 형 저입니다.'

 "아니, 동양인은 자기소개에 본인 얘기가 아니라 소속 얘기가 먼저 나오나요?"

 "그렇다면 잘난 서양인 당신은 소속을 제외하고 본인을 어떻게 설명하죠? 자신의 선호, 성격 그 외 당신이 서술한 모든 것이 당신의 소속과는 전혀 무관한 당신만의 특성이라고 자신하나요? 그렇다면 당신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신격화한, 자신의 위치가 어딘지도 모르는 어리석은 인간일 뿐입니다."


 나는 자꾸만 희석당하고 있었다. 분명 나는 조금  푸른색 트레이닝 반바지 차림의, 하얀 티셔츠 위에 그려진 알록달록한 그림 같은 사람이었는데. 어디서 누가 묻는 것이든 자기를 소개해 보라는  앞에서 한없이 망설여진다. 어디에도 속하지 했다. 나는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한데. 환영받지 못하는 곳에 억지로 엉덩이만 붙이고 있지는 않았나 자문한다.  명의의 집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고집하게  것도 어쩌면 자기소개를  제대로 하고 싶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저는... 여기도 저기도 속하지 못해서 무색무취인, 어느 날 그저 존재가 사라졌으면 하는 남자 1입니다. 아니, 남자가 아닐 수도 1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