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른한 오후, 일상에 지루함을 느낀 소년은 잠시 나가 걷기로 마음을 먹었다. 소년은 곧바로 무작정 집을 나와 발 길이 닿는 대로 일단 걸었다. 무의미한 발걸음. 소년은 걸으면서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그렇게 소년은 오랫동안 무의미하게 걷다, 강변에 닿았다. 강물은 노을빛에 붉게 물들어가고, 강바람에 날린 민들레 씨앗들이 그 위를 수놓고 있었다. 소년은 그 풍경에 매료되어 한참 동안 바라만 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변덕스러운 바람이 멈추자, 멀리 날아가 꽃 피울 줄 알았던 민들레 씨앗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소년의 눈동자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런 풍경을 본 것이 언제였을까?’
몇 가지 추억들이 소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그 가운데 오늘만큼 좋았던 풍경은 없었던 거 같았다.
‘과거의 추억들은 언제나 퇴색되는 걸까? 저 떨어진 민들레 씨앗들처럼. 아니면 내가 아직 많은 걸 경험하지 못해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의미해진 걸까?’
소년은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들과 분명 과거엔 최고의 경험으로 여겨졌던 일들이 지금 와선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져 우울해졌다. 땅을 보며 우울함에 젖어있던 소년의 발 밑으로 민들레 씨앗 하나가 보였다. 바람의 흐름에 하늘 높이 날다가 땅이란 바다에 빠져 잊힌 아이들. 소년은 문득 이 아이들이 자신의 추억과 같다고 생각했다.
‘한순간 반짝하고 빛났다가 무관심 속에 사라지는 게 똑같구나. 추억도, 민들레 씨앗도.’
소년은 고개를 들어 강변에 옹기종기 붙어있는 민들레꽃들을 보았다.
‘하지만 괜찮아. 비록 지금은 땅에 떨어져 잊히겠지만, 언젠간 그곳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다시 날아갈 준비를 할 거야. 민들레 씨앗도, 내 추억도.’
소년은 지금 생각한 것들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소년은 이 생각들도 잊힐 거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잊혀도 상관없었다. 잊힘은 싹을 피우기 위한 과정이니까. 소년이 여전히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하늘은 어느새 붉은빛을 감추고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소년은 별과 달의 밑을 걸으며 그렇게 민들레 씨앗들에게서 멀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