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귤 Dec 09. 2023

노바디로 살아남기

지리산 거중종주

새벽 2시 54분 어둠 엄숙히 내려앉은 거림탐방지원센터 앞.

후다닥 내리는 사람들 발걸음에 멱살 잡혀 결국 버스에서 끌려 나왔다. 흙바닥과 등산화 고무 밑창이 서로 하이파이브 한 순간, 밑창 틈새로 느껴지는 오돌토돌한 돌멩이의 표면감이 피로함에 내려앉은 혀의 까끌거림과 같아 여기 오기로 결정한 과거 나 자신을 원망한다. 그러나 이제 돌이킬 수 없다. 8시간 내내 버스 한 구석에 앉아 있는 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 중 가장 처량한 일이기 때문이다.

삼삼오오, 어둠 속에서 서로 이름을 부르며 짝짓는 이들 사이에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가방을 추켜 메 본다. 당당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겁에 질린 발꿈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남긴 발자국을 쫄래쫄래 따라간다.



모오두~ 영원하자~ 약속하지! 어이가 내 빰을 때에려~! 

날 그냥 내버려 둬! 책임 못져! 더 이상 부담주우지이마~! 



나는 드디어 진정한 혼자가 됐어, 단단히 독립 결심! 다시 혼자로 돌아가자! 나 원래 혼자서도 잘 살아!

양혜승 씨의 화려한 싱글을 며칠간 한곡 반복으로 듣다가 혼자 해볼 수 있는 일 중 가장 큰 도전을 해보기로 결심한다. 지리산을 가자.

지방산행을 혼자 간 적은 없었다. 난 꽤나 극단적이니까 일출로 가기로 한다. 혼자 산을 많이 다녀보긴 했지만 통금 있는 집안 첫째 딸은 해가 지면 안락한 집에 있어야 했다. 말 잘 듣는 딸로 자란 탓에 이제는 늦은 시간에 혼자 돌아다는 것을 꽤나 무서워하는데, 그래서 어둠 깔린 거리의 발자국과 시선에 민감하고 예민한 편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밤에 산을 혼자 가본 적이 없다.

산행 버스 예약을 하고 취소를 하고, 또 예약을 하고 취소를 하고를 반복하며 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우리 집 강아지 오구에게 물어보고 나 자신에게 물어보고, 엄마에겐 물어보지 않았다. 엄마의 답은 정해져 있으니까.



어랏, 며칠 뒤 다시 취소하려고 보니 취소 가능 기간이 지났다.이번 달 고지서로 날아올 적지 않은 돈을 생각하다 결국 그냥 가기로 한다. 설마 죽겠어.

그래도 혹시 죽을지도 모르니까 가방은 든든히 챙겨보자. 보부상 정신을 가득 담아 혼자여도 세명 몫을 너끈히 책임질만한 칼로리의 음식과 9월 치고는 두꺼운 옷, 혹시 모를 위험 상황에서 나를 구해줄 온갖 등산 장비를 바리바리 싸고 나니 마음이 설렌다. 아니 떨려서 무섭다.



버스 출발 시간 1시간 전. 벌써부터 사당 역 정류장 앞에 도착했다. 

버스 기사님은 휘둥그레 벌써 왔냐며, 믹스커피를 뚝 뜯어 휘휘 커피를 한잔 타 주신다. 감사하지만 마시지 못한다. 어두컴컴한 버스 안에 앉아있기가 싫어 떠껀한 종이컵을 한 손에 쥐고 동네 구경을 하기로 한다. 빵집을 두 군데나 들리고 마트, 편의점 신상 파악을 끝냈는데 아직 출발시간이 30분이나 남았다. 사람 구경을 한다. 뜨거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해진 초가을 주말 밤 11시 사당역. 다가올 단풍 축제처럼 불긋한 얼굴들이 공들여 음식을 고르고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가게 문이 열리고 닫힐 때마다 낙엽이 들뜬 발걸음을 좇아가기 바쁘다. 사람들은 아마 맛있는 걸 먹으며 넷플릭스를 보겠지? 


‘나도 집에 있을 시간인데… 그냥…………. 집에 갈까….’






인공 빛이 사라진 어둠 가득한 지리산. 시야에 걸리는 것은 없지만 축축한 흙내음, 그것이 발에 닿는 미끄덩한 촉감, 새벽 공기에 여흘거리는 물결, 이따금씩 이름 모를 새가 깨어나는 소리.

들리는 보지 못한 것 이상의 세상이 감각되는 공간에 나는 우뚝 서 있다.



한 치 앞만 보여주는 헤드렌턴에 의지해 한 걸음씩 걷기로 한다.

시작했으니 잘 끝내는 것은 오늘 나에게 주어진 단 한 가지 숙제다. 게다가 오늘 20km나 가야 한다고 하니,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쉽지 않기 위해 이곳에 왔지 않은가. 한 걸음 디뎌본다.

한 걸음이 10cm 정도 되니까. 오늘 걸을 걸음 수는……..?!

급격하게 포기하고 싶지만 여기서 포기하면, 지금 나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행과 함께 빛나는 별을 하나, 둘 세며 감상에 젖은 이들, 나에겐 그럴 시간도 없다. 앞에 가는 사람을 놓쳤다간 무서운 산길을 오롯이 혼자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몇 달간 산에 오르는 것을 멀리해 등력은 한참 낮아졌을 텐데 겁이라는 녀석이 등력을 절로 늘게 한다. 걷다 보니 이 속도도 꽤나 괜찮다. 



노바디가 되어 걷는 시간, 평지에서는 항상 어떤 이름으로 붙여졌는데 여기서는 내가 보이기는커녕 내가 누구인지도 나를 증명할 필요도 설명할 이유도 없다.

동료가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가도 설명할 필요 없는 지금 내 상태가 좋기도 하다. 잊고 있었던 노바디 감각을 되찾은 느낌에 후련하다. 그러나 쉽지 않은 오르막길에 숨이 턱 막히기도 한다. 여전히 썸바디가 되었다가 노바디가 된 기분은 아직 어색하다. 



산에서의 시간은 일상과 참 다르다. 추울 땐 따뜻하고 따뜻할 땐 시원한 안락한 의자에 앉아 있는 사무실에서는 한 시간도 무거운 추를 달고 흘러가는데, 추울 땐 춥고, 따뜻할 땐 따뜻한 딱딱한 바위에 앉아야 하는 산에서는 시간이 참 빠르다. 걷다 보니 어느새 세 시간이 지나 동 틀 무렵의 어스름한 기운이 느껴진다.

세석 대피소에 도착한다. 마른 목을 축이고 전날 정성스레 집에서 한 시간이나 떨어진 주먹밥 맛집에서 공수해 온 명란 주먹밥을 먹어볼까 하는데, 왠지 손이 가지 않는다. 혼밥 장인도 왠지 오늘은 입맛이 없다. 대피소에서 흘러나오는 맛있는 음식 냄새의 유혹을 뒤로하고 촛대봉을 오른다. 촛대 위로 피어오르는 태양을 만나기 위해. 



어둑새벽이 지나고 여명이 동트는 시간, 돋을볕이 어둠을 밀어내고 하늘에 기운을 퍼뜨리며 지리산 끝에서 빨간 덩어리가 보인다. 뿅긋하고 끝자락을 보여주던 햇덩이가 방긋, 흔들림 없고 거침없이 떠오른다. 하루의 탄생이다.

덩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의 빛에 눈이 아려온다. 눈도 마음도 아리다. 그 아림은 새로운 도전을 결정하고 이룩한 성취에 대한 아림, 동시에 썸바디를 잃고, 다시 노바디로 시작함을 축하하는 아림이다. 항상 그렇지만, 출발할 때 마음과 전혀 달리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오늘을 어김없이 잘 떠나보내겠노라고 다짐한다.

기다리고 있을 엄마에게 영상통화를 건다. 엄마 해 좀 봐. 스마트폰은 그 빛과 볕을 담기엔 터무니없지만 엄마는 그래도 예쁘다 한다. 매일 뜨는 해도 용기 내서 땀 흘려 가며 만난 햇살은 특별하고 그래서 흘린 땀이 더욱 투명하게 빛난다. 



함께 일출을 보게 된 노바디들과 친구가 된다. 생각보다 혼자 이 먼 곳에 일출 보러 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나만 혼자 온 게 아니라는 사실에 겁에 대한 기준이 상향평준화됨을 느끼며 한층 씩씩해진 기분이다. 어쩌면 어깨가 지리산만큼 올라왔는지도. 노바디를 자처해 지리산에서 만난 사람들은 특별한 썸바디가 되지 않도록 노바디로서 경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그 따뜻함은 허용치 이상이었는데, 정상에서 따뜻한 커피를 나누고, 추워서 빨리 가고 싶어도 서로 일정한 거리를 맞춰주고, 넘어진 자를 위해 약을 나눠주기도 한다. 그 친절한 상호 환대 때문에 출발할 때부터 놓지 못한 마음의 굳은살이 풀리고 딱딱하게 굳은 긴장도 푸근한 지리선 능선처럼 부드럽고 온화하게 풀린다. 



어느새 머리 위에서 늦여름, 초가을의 기분 좋은 볕이 느껴진다. 나는 분명 산 위에 있는데, 아래에 구름바다가 펼쳐져서 포옥하고 빠지면 기분 좋은 거품 목욕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뜻한 볕을 맞은 구름들은 뭉실둥글 동동 떠다니다 둥글고 부드러운 지리산 자락에 살짝 걸쳐 쉬어간다.

오늘 산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은 장터목 대피소에서 천왕봉 사이 구간에 자리한, 구름과 안개 위에서 신선들이 여유를 즐긴다는 연하선경이라고 하는데 나는 지금 여기 이름 모를 이 공간이 가장 아름답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산은 강하고 거친 설악산인데, 오늘 같은 마음에는 부드럽고 포근한 지리산이 참 좋다.



삶에서 스스로 허용한 범위 이상의 용기를 내보는 것, 그 용기에 책임지는 시간은 의미 있다. 특히 사람은 썸바디가 아닌 노바디가 되었을 때 더 과감한 용기를 내게 되고 그 도전의 여정을 통해 어떤 가치 있는 것, 가치 없으면 어떤가, 하릴없어도 의미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혼자 있을 적에 가장 고독하지만 동시에 가장 강해진다.

노바디에서 썸바디로 되어가는 과정은 쉽지 않다. 그러나 썸바디에서 노바디로 돌아갔을 때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두 간극을 자유롭게 오가는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그리고 닿게 된 그곳에서 만난 노바디들의 사연, 대화. 평소 생각하는 것도 삶의 범위도 다른 사람들이 태초의 자연 아래에서 지구 구성원으로서 함께 숨을 쉬며 걷는 것은 꽤나 비효율적이고 원시적이지만 가장 자연스럽고 선명한 시간이다. 



다녀와서 며칠간 무릎이 시렸지만 마음 깊숙히 자리잡은 지리산 기운이 몸 속 깊숙한 곳에서 맴돌고 맴돌아, 결국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혼자서 조금씩 더 멀리 떠나보기로 결심한다.






1, 산행한 날짜 : 2023년 9월 24일 일요일

2. 오늘의 코스 : 거림 주차장 - 세석 대피소 - 촛대봉 - 장터목 대피소 - 천왕봉 - 로터리대피소 - 중산리탐방지원센터 (21.13km)

3. 산행 시간 : 8시간 15분 (휴식시간 포함 9시간 27분) 



작가의 이전글 사라진 오구(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