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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Apr 09. 2024

내 나이만큼 하기

블로그를 하지 못하는 이유

멤버들끼리 1월 독서 모임에서 새해 목표를 나누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서로의 한 해 계획을 듣던 중 한 멤버가 말한 다짐이 인상 깊었다. 내 나이만큼 어떤 것 하기. 블로그 글 30개 쓰기, 책 307권 읽기와 같이 자신이 먹은 나이만큼 원하는 목표를 실행하겠다는 것이다. 결심과 시간은 부연 안개같이 형체가 없기에 그것을 형상화하기 위해 나이에 맞게 뭔가를 해보자는 취지는 참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고, 나잇값 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울 것 같았다. 그래서 나에게도 적용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1분기가 지나면서 실감하고 있다. 목표를 나이만큼 해내는 것은 꽤나 어렵다는 것을. 사실 내가 적은 나이를 산 것도 아니고 새로운 어떤 것을 먹은 나이만큼 해내기에 충분히 게으르다는 사실을 매번 잊으면서도 또 잊고 있었던 것이다.  



새해 결심 중 블로그에 글 쓰기가 있었다. 블로그라 하면 20살 대학교 입학하는 새내기 때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깨지기 쉬운 결심인데, 영어공부처럼 매번 다짐만 하는 영혼 없는 목표였다.10년 전쯤에는 파워 블로거가 성행하는 시기였고 유튜브가 뜨기 전 생생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네이버 블로그와 티스토리가 큰 위력을 발산했다. 실제로 선배가 체험단으로 당첨된 곳에서 밥을 얻어먹으면서 파워 블로거 위력을 느껴보기도 했다 그런 혜택을 간접 경험하면서 블로그를 아예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몇 개 글을 남겨보다 곧장 모든 글을 삭제하거나 비공개로 바꿨다.  그 이유는 누가 나를 알아볼까 봐, 쓴 글이 부끄러워서, 그냥 안 하고 싶어서였고 가장 뿌리 깊은 이유는 그 글에 들어간 단어와 문장과 사진이 완벽하지 않아서였다. 완벽하지 않은 것을 세상밖에 ‘감히’ 내보이는 것을 스스로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완벽한 자의식 과잉인 것이다. 그렇게 완벽한 시기와 때와 장비와 기술이 갖춰질 때까지 주저하다가 10년의 시간이 지났고 이제 다시 내 나이만큼 글을 남겨보기로 했다.



블로그를 내 나이만큼은 써보자는 결심을 한 뒤로 어디만 가면, 나 블로그 해야 해! 주변을 피곤하게 과하고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러나 막상 컴퓨터 앞에 앉으면 성글어진 기억과 파편화된 사진을 잘 정리해 탄탄한 어떤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매번 느낀다. 평소 맛집이나 새로 사고 싶은 물건 후기, 숨은 꿀정보를 찾을 때는 쉽게 스크롤해 넘긴 정보는 누군가가 몇 시간을 걸쳐 공들인 기록이었다. 그렇기에 아직 내 나이만큼도 써보지 못한 나는 그 시간과 노력이 불편하고 익숙지 않다. 매번 글을 쓸 때마다 그간 스쳐 지나간 많은 페이지에 담긴 글쓴이의 고노에 감탄하다가도 그것만큼 내가 야무지게 정리하기에 머리가 아파 그만 침대로 폭 들어간다.



분명 나에게도 미국여행에서 프로틴바를 종류별 맛별로 사 와 그것들의 맛을 분석하고 싶던, 맘모스 빵을 너무 좋아해서 전국팔도 맘모스의 단면을 비교해 본, 1분 이상 못 달리던 사람이 런데이를 2000일째 해서 마라톤에 나간, 학교 다니던 시절 일주일 중 체육시간을 꼽아서 그만큼 아프기를 자처하던 사람이 일주일에 한두 번 이상 전국 팔도로 등산을 다닌, 누군가에게 와닿아 또 다른 영감을 낳고 싶던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기록되지 못한 기억들은 나의 오랜 사진첩에 아무렇게나 분열되어 그 사이로 켜켜이 먼지가 쌓였다.

누군가는 자신의 생각과 기록물을 쌓아 올려 자신만의 작은 마을을 만들었을 시간. 성공은 못했을지라도 최소한 자기 자신이 남긴 취향의 자취를 통해 본인을 더 잘 이해했을 지난 시간, 내가 이루지 못한 흐른 시간에는 늘 아쉬움이 있다. 그때 시작했더라면, 누군가의 시선을 그냥 무시했더라면, 더 용기를 가졌더라면, 완벽을 추구하지 않았더라면, ‘라면’은 언제나 실제로 먹는 것도 마음으로 먹는 것도 후회를 낳는다.



어쩌면 내 나이만큼 뭔가를 한다는 것은 살아온 세월만큼의 관성을 이겨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이 먹을수록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것이 둔해지는 만큼 나이 수만큼 강해진 관성에 이겨내기 위해 계속하는 것을 노력하는 일인 것이다.  

그리고 나이만큼 뭔가를 한다는 것은 먹은 나이만큼 부끄러움을 이겨내야 하는 숙제 같다. 나이가 들 수록 내가 나이 먹은 만큼 더 잘 해내야 하고, 더 성숙해야 하고 더 전문적이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는데 그런 부담을 이겨내고 세상에 나의 불완전함 드러내기를 연습하는 횟수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사진의 수평과 수직이 맞는지 점검하고, 어도비 라이트룸(사진 편집 프로그램)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보정을 거치지 않으면 올리지 못하는 부끄러운 완벽주의를 벗어나지 못한다. 근데 세상은 생각보다 얼마나 완벽하게 했냐에 별 관심이 없다. 나이만큼의 무언가를 해보기로 한 지금, 이제는 불완전한 결과물을 삭제하지 않고 눈 꼭 감고 참아보기로 한다. 



디자이너들이 블로거를 못하는 이유는 너무 완벽을 추구해서야!라는 동료의 말처럼 디자이너들은 분명히 디테일한 부분 하나하나 유심히 보고 콘텐츠에 완성도를 높이는 것을 중요시 여긴다. 누가 완벽하지 못한 내 글을 보면 부끄럽고, 과한 공을 들이다가 곧 뭘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 불시에 완벽한 무기력증은 발동한다. 

덜 완벽해도 괜찮으니 최소한 내가 먹은 나이만큼만 지속한다면 나이만큼 책임질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거라는 믿음으로 올해는 나이만큼 내 나이만큼만 이라도 기록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덜 완벽하려고 노력하고 보다 느슨하고 편안한 기록을 남기고 싶다. 이 일이 부질없다고 느껴질지라도 꾸준히 기록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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