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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귤 Apr 15. 2024

벚꽃 달리기

지난겨울 엄마가 간장과 설탕에 푹 절인 무처럼 종아리가 묵직하다. 무거운 다리에 운동바지를 욱여넣는다. 단지 입은 것만으로도 한결 다리가 가볍다. 그래도 아직은 무거운 발이 징징거린다. 애써 무시하고 신발을 신는다. 신발끈 리본을 정성스레 묶어 살살 마음을 달랜다. 밖으로 나가 뛰듯 살짝 템포를 줘 걷는다. 조급해하지는 않는다.


집 앞에서 5분만 벗어나면 나오는 공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다. 5분만 가기 싫은 불편함을 견디면 이제는 계속 갈 수 있다. 오고 가고 5km, 딱 한 시간 내외로 적당히 걷고 달릴 수 있는 공원 앞에 사는 것은. 큰 행운이다. 공원에는 길고 넓은 천이 있다. 천을 사이로 두 개의 길이 있는데 한쪽에는 아파트와 민트색 트랙이 다른 한쪽에는 주택과 아스팔트길이 있다. 천에는 오리와 황새가 산다. 어느 계절은 아기 오리가 어른 오리가 되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매일매일 커가는 오리들을 만나기 위해 적당한 먹이를 챙겨 애틋이 산책길을 나설 수 있는 시기다. 공원은 언제 방문해도 좋지만 4월 초 가장 아름답다. 천의 경계선을 따라 벚꽃나무가 쭉쭉 뻗어 자라는데 하나 둘 벚꽃 팝콘을 터뜨리기 시작하면 본격적으로 달리기를 시작하는 계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바빠도 4월에는 매일 산책길을 나선다.


오늘같이 다리가 무거운 날도 예외 없다. 조심스럽게 달리다 보면 가장 무거운 것은 다리가 아니라 마음이었다는 것을 안다.  달리다 보면 다리가 한결 가볍다. 양파 껍질이 벗겨지듯 달리면 달릴수록 다리에 붙은 피로가 벗겨진다. 비로소 움직임이 불편하지 않고 익숙해지면 딛는 발바닥에 힘을 줘 좀 더 힘 있게 달려보기도 한다. 상큼한 새 잎 냄새가 묻은 봄바람에 묵은 땀방울이 훌훌 날린다. 1년 중 가장 많은 사람들을 만난 벚나무들은 꽃잎을 이제 하나 둘 바람에 흘려보낸다. 땅에 흐른 벚꽃은 되도록 밟지 않기 위해 피해 달린다. 바람에 흐른 꽃들은 강물에 떨어져 하얀 군집을 이룬다. 흩날리는 꽃비를 맞으며 달리다 보니 괜히 슬프다. 어릴 땐 떨어지는 꽃을 보고도 감흥이 없었는데 눈물은 왜 나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실 나이가 드니까 슬퍼도 기뻐도 눈물이 많아졌다. 슬픔의 힘을 가해 더 힘차게 달려본다.


빠르지도 오래 달리지도 못한다. 거리는 딱 오며 가며 5km가 적당하고, 매일매일 달릴 수 있을 정도의 끈기도 없다. 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추월해도 전혀 상관없으며, 오히려 그들이 주는 바람이 고맙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이 인증하는 페이스도 나의 달리기와 거리가 멀다. 그래도 꾸준히 달리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가장 고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고독은 스스로에게 가장 솔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가장 고독하기 위해 함께 달리는 것은 되도록 하지 않는다. 가장 슬픈 날 가장 고통스럽기 위해 달리기도 한다. 사실 ‘잘’ 달리지 못하는 것을 들키기 싫은 마음도 있다. 행위가 시작되는 고통과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과정, 성취의 기쁨과 종종 느껴지는 슬픔을 누리는 나만의 속력은 꽁꽁 나만 간직하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무거운 발에 더없이 정성스럽게 리본모양 운동화 끈을 묶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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