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그리고 새싹보리
흙 이야기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 수가 늘어나면서 흙을 구매하는 데에도 적지 않은 비용을 들였다. 텃밭이 있는 집에서 자라서 흙을 '구매'한다는 개념 자체를 낯설어하던 내가 어느새 마트에서 흙 포대를 짊어지고 나오는 사람이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1. 벌레차단
내가 생각하기에 실내 가드닝의 성패는 벌레를 얼마나 막아내느냐에 달려있다. 간혹 동네 뒷산에서 흙을 퍼다(...) 사용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묻는 분들이 계신데, 우선 불법인 데다 야외의 흙은 눈에 다 보이지 않더라도 벌레가 가득하다. 만약 내가 본가 마당에서 흙을 퍼다 분갈이를 했다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다행히 시중에 판매하는 흙은 사전처리(!)가 다 된 흙이기 때문에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다.
2. 맞춤영양
식물은 햇볕과 습도가 제일 중요하지만, 흙까지 신경 써주면 초기생육에 도움이 된다. '배양토'는 모종을 키울 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상토'에 각종 비료를 배합한 흙으로 홈가드닝 세계에서 제일 대중적인 흙이다. 관엽용, 열매식물용 등 그 종류가 다양하니 식물의 특성과 상황에 맞게 구입하여 사용하면 좋다.
문제는 이렇게 한 번 구매한 흙을 재사용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식물을 한 번 틔워낸 흙은 독소(염류)가 쌓일뿐더러 배수성이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매번 흙을 사다 쓰기엔 비용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적합한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휴경(?)을 할 수도 없는 욕심쟁이 식물집사는 흙을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섰고, 블로그(프로개)에서 '새싹보리'라는 놀라운 해결사를 알게 되었다.
새싹보리 이야기
새싹보리(캣그라스)는 어디에 뿌려도 잘 자라는 것으로 유명하다. 척박한 환경이어도 굴하지 않는다. 이 말은 즉, 한 번 사용한 흙에 뿌려도 쑥쑥 잘 자라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농업에서 새싹보리는 흙을 갈아엎는 용도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흙에 축적된 독소를 흡수하여 자라난 새싹보리는 (잡아먹거나) 잘라서 다시 그 흙에 뿌려주면 된다. 분해된 보리 싹은 훌륭한 비료가 되어 기존의 흙보다 더 좋은 흙을 만들어준다.
한 번 사용한 흙에 씨앗을 조금 뿌려보았다. 만 하루 만에 새싹이 쑤욱하고 자라났다. 성장속도 정말 감동적.
새싹보리는 정말 듣던 대로 쑥쑥 자라서 한 번 절단해 주었는데, 며칠이 지나자 다시 엄청난 속도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기특하긴 한데 좀 무섭기도... 새싹보리는 물을 끌어당기는 성질이 강한 식물이라, 아침이 되면 끝부분에 몽글몽글 이슬이 맺히곤 했다. 이건 좀 귀여웠다.
수확한 새싹보리. 잡아먹었다. 냠.
재수확한 새싹보리. 역시 잡아먹었다. 냠냠.
작은 화분에서 새싹보리 재배 실험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어, 우리 집에서 한 번 사용하고 남은 흙을 스티로폼박스에 다 모아서 새싹보리 씨앗을 뿌려주었다. 역시나 엄청나게 잘 자라주었고, 자라난 새싹은 잘게 잘라서 그 흙의 비료로 뿌려주었다. 그리고 그 흙을 지금까지도 잘 사용하고 있다.
입사 3~4년 차에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순간들이 정말 많았다. 내 남루한 체력과 내 마음밭을 다 소진해가면서 버텨냈던 순간들이었다. 버텨냈다 하더라도 대가는 정말 컸다. 다신 이 조직에서 일하고 싶지 않을 즈음 휴직을 결정했다. 그런 나 자신이 원망스럽고 답답하고 부끄러워서 그 어려운 시간 동안 나를 돌보아준 사람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연락도 멀리하며 세상에서 나를 감췄나갔다.
그로부터 1년의 시간이 지났고 제 풀에 지쳐 주변에 소홀했던 내가 다시 세상에 멋쩍게 나타났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정하게 나를 대해준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 덕에 내가 두려움 없이 무사히 복직 첫 해를 소화할 수 있었다.
척박한 흙에서도 새싹이 자라나고 그 새싹이 흙을 다시 숨 쉬게 하듯이. 다 소진되다 못해 유해물질이 한가득 쌓인 내 마음밭에 새싹이 되어준 사람들. 그 사람들 덕에 행복했던 2022년이었다. 2023년은 부족한 나에게 곁을 내어준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랑과 따스함을 나눠줘야지.
인쁘삐(IN-FP).
1995년에 태어나 24살부터 시작한 공무원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직업적성검사를 새로 했더니 개그맨이 나와서 결국 못 그만두고 다니는 사람.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는 욕심이 항상 드릉드릉 가득하지만, 사람 많은 곳은 싫어하는 전형적인 INFP.
먹는 식물은 죄다 죽이고 못 먹는 식물은 세상 잘 키워내는 능력치 애매한 식집사.
직장생활 꽤나 힘들어하고 일도 잘 안 맞는데 나름 또 정년퇴직은 하고 싶어서,
숨을 얕게 쉬며 회사를 다니는 20대 직장인.
어느 날 문득, 도대체 나는 왜 이런 사람인지 고민만 할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동안 마주했던 순간들을 털어놓으며 나를 이해해보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