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포케(epoche)에 관하여
들어가며
2022년과 2023년 새해 초반은 정말 말 그대로 다사다난했다. 코로나로 인한 아내와의 생이별, 야심 차게 시작한 구매대행 사업과 블로그의 정체기, 여름부터 겨울까지 이어진 극심한 우울함과 무기력함, 세 번째 시험관 시술의 성공, 힘찬 심장박동을 들려주다 9주 만에 하늘의 별이 된 우리 첫 아이 꼬미(태명), 1년 만에 아내, 가족들과의 재회 등 정말 롤러코스터와 다를 바 없는 삶의 연속이었다. 아니, 롤러코스터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내려갈 때 짜릿함과 즐거움을 선사하는 롤러코스터와는 달리 인생은 내려가고 떨어질 때 좌절감, 우울감이 드니까 말이다.(장재형 님의 '마흔에 읽는 니체'에 나온 롤러코스터와 인생을 비교한 내용을 인용)
12월의 마지막 즈음, 그러니까 크리스마스를 막 지난 시점에 나와 아내에게 찾아온 하늘의 선물이었던 꼬미가 9주 만에 더 이상 심장박동을 들려주지 않고 우리 곁을 떠났을 땐 한없이 슬펐다. 슬프고 또 슬펐다. 꾹꾹 눌러가며 또 추스르며 아내를 위로하고 마음을 강하게 먹었지만, 전화기 너머로 엄마 목소리를 듣는 순간 어렸을 때 처음 기르게 된 반려견 별이를 다른 집으로 입양 보내고 울었던 초등학교 3학년 딱 그 당시의 나처럼 엉엉 울어버렸다. 이럴 수는 없었다. 왜 이렇게 시련을 주시나. 왜 나에게만, 왜 우리에게만. 이런 생각들이 도무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남들은 쉽게 돈 벌고, 쉽게 아이도 갖고, 그렇게 쉽게 쉽게 잘들 사는 것만 같은데, 왜 나는, 왜 우리는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을까. 작년 여름부터 12월까지 이어진 기나긴 우울함을 끝내줬던 꼬미를 잃은 상실의 아픔은 나를 더 깊은 지하로 끌어내렸다. 아니 나 스스로 그렇게 끝없이 떨어졌다. 밑으로, 밑으로.
위대한 정오, 그리고 에포케
세상이 끝난 것처럼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난, 딱 마흔의 문턱을 넘는 그 좁은 문지방 위에 잠시 멈춰서 있다. 문지방을 넘어서야 하는데, 뭐가 그렇게 두려워서인지 넘지 못하고 발을 떼지 못한다. 보이지 않는 벽이 내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듯하다. 나아가고 싶다고 외치고 몸부림치지만, 사실은 시늉에 불과할 뿐이고, 발은 땅에 단단히 붙은 채로 떨어지지 않는 데다, 설령 발을 뗄 수 있다고 해도 날 가로막은 투명한 벽은 당최 나에게 길을 터줄 생각이 없을 것만 같다. 그런데 그 순간 니체가 말했다. 내가 서있는 좁디좁은 공간이, 돌아가지도 나아가지도 못하는 이 시점이 바로 '위대한 정오'라고. 새로운 아침을 향해가고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니체의 이 말을 전해준 장재형 님은 이렇게 덧붙였다.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삶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며, 또한 시작은 있으나 그 끝은 알 수 없다고 말이다. 그렇게 난 '위대한 정오'에 멈춰 서서 에포케(epoche, 멈춤 또는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둠을 의미)를 시작하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에포케를 음미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아침 명상을 시작으로 해서 가사를 음미하며 노래를 듣는 것, 그날그날 기분이나 감정에 따라 영화나 드라마를 골라보는 것,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는 것, 그리고 수전 케인이 그녀의 저서 '비터 스위트'에서 추천한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일기와 비슷하지만 결이 조금 다른) 글쓰기 등이 그것들이다.
에포케 #1 : 명상
할 엘로드의 저서 '미라클 모닝'을 통해 시작한 일련의 루틴에 명상 비슷한 것들이 있기는 했지만, 좀 더 본격적으로 명상을 시작하게 된 것은 '명상 래퍼'라는 별칭이 있었던 김하온이라는 래퍼의 영향이 지대했다. 그가 고등래퍼 3에 출연하면서, 그리고 고등래퍼를 우승한 뒤 레이블에 들어가서 낸 첫 번째 앨범에서 그가 써 내려가고 읊었던 노래의 가사는 정말 인상 깊었다. '저 어린 친구가 어떻게 저렇게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른 듯한 가사를 썼을까?' 하는 생각에 가사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고, 그는 그렇게 자신의 랩을 통해 나를 '리얼리티 트랜서핑'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이 '리얼리티 트랜서핑'을 통해 펜둘럼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인생의 트랙으로 옮겨가기 위한 진정한 의미의 명상을 시작하게 됐다. 긴 침체기에 잠시 내려놓았던 명상을 니체의 도움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면서 긍정의 힘을 얻고 있다.
에포케 #2 : 노래
가사를 음미하며 노래를 들을 때면 머릿속에 생각이 스치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내가 미처 알아채기도 전에 가슴으로부터 온몸으로 퍼지는 소름이 돋아남과 동시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경험을 자주 하는 편이다. 이 느낌과 감정의 속도가 워낙 빠르다 보니 말과 글로 표현하기가 정말이지 쉽지 않다. 애써 그 감정을 되새겨보며 정리하고 글로 표현해 보고자 노력해도 그 느낌 그대로, 그 감정 그대로를 옮겨 적을 수 없다. 최근의 경험을 예로 들면, 성시경의 '너의 모든 순간'을 듣다가 아내 생각에 울컥했던 적이 있다. 이 노래는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의 OST인데, 심지어 난 그 드라마를 보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노래를 들으면서 그 드라마의 어떤 애틋한 장면을 떠올릴 수도 없었는데, 그리고 그 노래를 한두 번 들었던 것도 아닌데도 그날 유독 이 노래의 가사 하나하나가 모두 아내를 향했고, 아내를 향한 나의 애틋한 감성을 건드려 결국 코끝이 찡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에포케라는 단어와 의미를 오늘에야 알게 됐기에 그 당시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 순간이 바로 에포케였던 듯하다. (또 하나 전율이 일었던 것은 '너의 모든 순간'의 작사가 심현보 님이 내가 아내와의 결혼식 때 부른 축가 '사랑은 그런 것'을 불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오늘, Lukas Graham의 'You're not there'를 들으며 또 한 번 에포케를 경험했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을 담은 그의 노래 가사와 특유의 목소리는 마냥 그리워할 수는 없는 나의 아버지를 그리워하게 만들었으며, 얼마 전 쓴 일기에 쓴 '이제야 내가 알게 모르게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을 깨닫게 되고, 이제야 미학을, 아버지를 더 알고 더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와 술 한잔하고 싶다. 마흔이 되어서야.'라는 문구를 다시 찾아보게 만들었다. 아버지를 닮지 않았지만 닮은 나를, 아버지 없는 세상에 스스로 부딪히며 살고 있는 나 자신을 아버지께 보여드릴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어려서 항상 아버지 기대에 어긋났던 것처럼 지금의 나 역시 아버지와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지만, 당신의 아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인정하고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에포케 #3 : 영화
어려서부터 영화를 정말 좋아했다. 아버지가 비디오 대여점에서 비디오를 빌려오실 때면, 특히 성룡, 이연걸이 나오는 홍콩 액션/무협 영화의 비디오를 빌려오실 때면 관람 가능 나이가 되지 않았음에도 나를 불러 앉혀서 같이 봐주시기를 기대했다. 그렇게 시작된 영화에 대한 애정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한 명의 감독이나 배우에 빠지면 그들의 작품을 빠짐없이 찾아봐야지만 직성이 풀리던 때도 있었고, 그 종류가 무엇이든 나를 어떤 감정의 소용돌이에 집어넣고는 꺼내주지 않는 영화를 보게 되면 매일 밤 틀어놓고 졸다 깨다 하면서 계속 보던 때도 있었다. 요즘은 워낙 다양한 OTT가 있어서 정말 많은 콘텐츠들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더 많은 작품을 경험하고 싶은 욕심에 필모 파고들기나 매일 돌려보기는 하지 못하지만, 그 많은 작품 하나하나 들이 장르나 국적을 불문하고 나에게 다채로운 영감을 줌과 동시에 에포케를 경험하게 해 준다.
최근 본 덴마크 영화 '토스카나'도 그중 하나다.(덴마크 영화인데 배경은 이탈리아 남부 도시 토스카나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정말 기대치 않았음에도 신기하게도 앞서 말한 Lukas Graham의 'You're not there'라는 노래와 뒤에 언급할 수전 케인의 저서 '비터 스위트'에 나오는 상실에 관한 내용과 맞물려 각각의 콘텐츠를 접할 때 경험한 것에 더해 더 큰 감정과 전율과 에포케를 경험케 했다.
에포케 #4 : 책
아내가 한 번은 어디서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이들이 부모들을 보고 자라는 만큼 부모가 하는 것을 따라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나에게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다. 굳이 곰곰이 따져보지 않더라도 맞는 말임을 직감했다. 어려서 아버지의 서재는 사면이 책장이었고, 책장엔 책이 빼곡했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항상 책을 읽고 계셨고, 가끔 서점에 가실 때면 10권이 넘는 책을 사 오시기가 일쑤였다. 그런 아버지는 나에게도 다독을 종용하셨는데, 뭐든지 억지로 시키면 하기 싫은 법이다. 독후감을 써오면 용돈으로 천 원씩 주겠다는 말씀에 바짝 열심히 읽었던 시기가 있기는 했지만, '데미안'에 가로막힌 내 독서 이해력의 한계에 책은 나와는 맞지 않는 옷이라 여겼었다. 하지만 정말 어릴 적 보던 아버지가 책을 읽으시던 모습의 잔상 때문인지 결국 난 어느 시점부터 책을 읽고 있었고, 시작은 흥미로운 추리 소설이었지만 이제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는다. 그리고 최근 독서를 하면서도 에포케를 자주 경험한다.
최근 읽은 수전 케인의 저서 '비터 스위트'는 사실 산지 꽤 된 책이다. 50페이지가량 읽다가 멀어졌었는데, 니체가 나를 이 책으로 다시 이끌었다. 인생을 살면서 항상 기쁨과 행복만 느끼면서 살 수는 없기에 우리는 고뇌하고 슬퍼하고 아파하는데, 거기에 머무르면 니체가 말하는 초인으로 가는 길로 향하지 못하고 반대쪽인 짐승이 되어가는 길을 걷는 것과 같다. 슬픔, 아픔 등의 씁쓸한 감정을 어떻게 이용해서 초인이 되는 길을 걸어갈 수 있을까? 바로 이 질문이 '비터 스위트'를 다시 읽게 만든 것 같다.
수전 케인은 '비터 스위트'에서 인생의 소울메이트인 스트라드 바이올린을 잠시 한 눈을 판 사이에 도난을 당하면서 최고 행복한 시점에서 최악으로 상실의 슬픔을 경험한 바이올리니스트 김민진의 사례와 함께 자기 자신이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겪은 일, 그리고 느지막한 결혼과 동시에 코로나로 인해 세상을 등진 친오빠의 이야기들을 소개하며 인생에서 겪는 상실, 슬픔, 아픔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모든 챕터에 나오는 내용과 사례 하나하나를 접할 때마다 순식간에 감정이입이 되어 무수히 많은 감정을 느끼고 영감을 얻었다. '비터 스위트'를 읽는 내내 에포케였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고, 이는 또 다른 에포케를 내게 선사했다.
에포케 #5 :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글쓰기
글쓰기는 삶에서 떼려야 뗄 수가 없다. 공교육을 받으면서 쓰게 되는 작문부터, 수능을 준비하며 공부하는 논술, 대학교에서 쓰는 리포트와 논문, 사회생활을 하며 쓰게 되는 수없이 많은 메일의 수많은 문장들. 그런데 이 많은 글쓰기 중 온전히 나를 들여다보게 되는 글쓰기는 몇이나 될까? 아마 일기를 쓰는 분들은 그나마 자신을 잘 들여다보고, 자기감정에 솔직하고, 자기 자신을 더 잘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이 경우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 또한 그랬다. 노래, 영화, 책을 좋아하고, 감성적인 데다 공감, 감정이입을 잘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느낀 감정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글로 쓰지 않다 보니 그냥 그렇게 흘러가버리고 되돌아봤을 때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 '비터 스위트'에서 수전 케인이 추천한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감정을 표현하는 글쓰기를 시작했고, 그 효과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나는 이 글쓰기를 시작한 시점이 내 인생에서 또 하나의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생각한다. 나 자신을 들여다보면 들여다볼수록, 내 감정에 대한 글을 쓰면 쓸수록 나를 더 잘 알게 되고,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그것들을 어떻게 내 삶에 반영하고 나아갈지 고민하게 된다. 글을 쓰는 그 시간, 내 감정을 들여다보는 그 순간순간이 또 하나의 에포케의 순간들이다.
마치며
우리가 살면서 겪는 상실, 아픔, 슬픔 등의 쓰디쓴 고통의 감정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나와 아내가 세 번의 시험관 시술을 통해 어렵게 꼬미를 얻었지만, 꼬미가 결국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하늘의 별이 되면서 나와 아내에게 준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는 이루 말할 수가 없다. 그리고 영영 그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감정들에서 벗어나야만, 모두 떨쳐버리고 잊어버려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수전 케인을 통해 알게 된 일본 시인 이사의 사연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일본의 4대 하이쿠(단시, 우리나라로 치면 시조) 시인 고바야시 이사는 51살의 나이로 늦깎이 결혼을 했고, 아내가 2명의 아들을 낳았지만 모두 한 달 만에 죽고 말았다. 이후 태어난 딸 사토는 천연두로 인해 두 돌이 되기 전에 죽었다고 한다. 그 상실이 얼마나 아프고 슬펐을지 감도 오지 않는다. 그는 그의 비통함을 다음의 하이쿠에 표현했다.
이슬의 세상은
이슬의 세상,
하지만 그래도......
'이슬의 세상'이란 물이 처음 흘러나온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듯, 시간을 되돌리기가 불가능하다는 뜻으로 이해가 된다. 그는 상실의 슬픔을 이겨내거나 떨쳐버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마지막 문구 '하지만 그래도......'에서 그가 온전히 그 슬픔과 아픔을 간직하고자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순탄한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벽에 부딪힐 때, 인생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이랬다면 어땠을까, 저랬다면 어땠을까 후회하면서 나 자신을 탓하거나 비통에 잠기기보다는, 잠시 숨을 고르며 멈춰 서서 과거를, 지금을, 나 자신을 찬찬히 들여다보자. 그 시점에 우린 '에포케', 즉 멈춤과 돌아봄이 필요하다. 니체가 말하는 '위대한 정오'의 시점에, 바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고, 나를 들여다보다 보면 상실, 아픔, 슬픔의 경험들을 온전히 간직하면서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되고, 길이 보이게 된다. 굳이 방향을 억지로 틀거나 힘듦을 억누르고 나아갈 필요는 없다. 멈춰 서있는 그 시간에 머무르면서 얻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다. 멈추고 돌아보면, 나아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