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에세이 8월호
(월간 에세이 8월호에 실렸던 에세이를 공유합니다. )
의과 대학에선 본과 3학년부터 병원 실습이 시작된다. 처음 가운을 입고 임상을 접하는 시점이다. 실습 전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과도할 정도의 주입식 교육을 받지만, 병원에선 그저 백지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병동 회진도, 수술방 참관도, 외래 문진도 모든 상황이 낯설었다. 처음 마주하는 매 순간들은 낯선 만큼 강렬했고, 기억에도 오래 남았다.
그중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단연코 외과 실습 시절이다. 첫 어시스트를 했던 장기 적출 수술은 8년이 지난 지금까지 눈에 선하다. 당시 모교에선 이따금씩 뇌사자 간이식 수술을 하였다. 전국에 생기는 뇌사자 중에서 운 좋게 본원의 환자가 우선순위로 배정되면 한밤중이어도 수술이 진행되었다. 뇌사자가 발생한 병원으로 이동해 장기를 적출하고, 가지고 온 장기를 환자에게 다시 붙이는 일련의 과정은 적어도 한나절 이상 소요되었다. 뇌사자가 있는 병원이 멀기라도 한 경우에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본과 3학년 때 장기 적출을 다녀왔던 곳은 순천의 어느 한 병원이었다.
당시 외과 실습을 반추해 보면 학생들은 슬의생의 홍도와 윤복이처럼 수술방의 벽에만 붙어있었다. 정말 수술방에 손이 없거나, 어쩌다 한 번씩 교수님의 눈에 들어오는 날엔 어시스턴트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수님이 학생을 장기 적출에 보낸 적은 처음이었다. 학생 때부터 외과에 관심을 보였던 내게 '이래도 외과 할 거니?'란 일종의 테스트였을까. 외과 주니어 교수님과 간호사 선생님 두 분, 그리고 학생인 나. 이렇게 4명이 병원 구급차를 타고 순천으로 출발했다. 흔들리는 구급차의 뒤 칸에 매달려 꼬박 세 시간을 이동했다. 그리고 속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댈 틈도 없이 바로 수술장으로 들어갔다.
무영등까지 피가 솟구치는 장면은 의학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다. 하지만 허구가 아니었다. 장기 적출 도중 드라마 속 장면을 실제로 보았다. 뇌사자의 대동맥을 클램핑 했던 기구가 빠지면서 대량의 피가 뿜어져 나왔다. 얼굴은 물론 무영등까지 피가 튀어 올랐다. 황급히 손가락으로 피를 막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술이 재개되었지만, 사람의 뜨거운 피를 처음 맞아보곤 가슴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수술의 몰입감은 배가 되었고, 언제 끝난 지 인지하지 못한 채 떼어낸 간을 들고 돌아가는 구급차에 몸을 실었다. 살면서 그렇게 강력한 몰입은 처음이었다.
이후 의사가 되고, '다른 과를 전공해 볼까'란 고민 한번 없이 외과에서 수련을 받았다. 마치 정해져 있던 길이었다는 듯 돌아보니 외과 전문의가 되어있었다. 하지만 이식을 전공하게 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어쩌다 보니 환자의 중증도와 응급도가 동시에 높은, 외과에서도 기피하는 이식외과를 전공하고 있다. 기억 한편에 있던 학생 때의 장기 적출 수술을 지금은 직접 집도하고 있다.
수술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된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피가 솟구쳤던 그때의 상황은 퍼퓨전(Perfusion, 관류)이란 과정이었다. 장기 적출 수술에서 퍼퓨전이란 환자의 심장을 멈추고 온몸의 피를 빼내는 과정을 의미한다. 환자의 복부 대동맥에 카테터를 연결하고, 심장 아래에 구멍을 내면 모든 피가 1-2분 사이에 빠져나간다. 그리고 투명한 수액이 뇌사자의 몸을 가득 채운다. 이 순간 수술방에 있는 모든 의료진들이 고요해진다. 장기 적출 수술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만약 퍼퓨전이 잘되지 않으면 뇌사자의 장기들은 피떡으로 가득 차게 되고, 장기를 더는 쓸 수 없다. 반대로 퍼퓨전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심장과 폐, 간, 신장과 췌장. 장기들이 하나씩 뇌사자의 몸에서 전국 각지의 병원으로 이송된다.
퍼퓨전과 동시에 수술방이 고요해지는 이유는 단지 수술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성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한 생명이 지나감과 동시에, 또 다른 생명이 시작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의 고요는 모두가 행하는 자발적인 침묵이다. 뇌사자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피가 한 인간의 마지막 흔적이라면, 그 자리를 메우는 투명한 수액은 누군가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이자, 암시다.
매번 장기 적출 수술이 시작될 때마다 수술방에는 짧은 추모사가 울려 퍼진다.
"누군가의 사랑이었고, 누군가의 그리움인 OOO 님이
이 땅에 사랑의 꽃씨를 뿌리고 떠나십니다.
고인이 주신 나눔의 사랑이 더욱 널리 퍼지게 해 주시고
가시는 길에 평안과 안식이 있으시길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추모사처럼 누군가의 사랑으로 탄생한 생명의 끝은, 또 다른 누군가의 생명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퍼퓨전은 삶의 끝과 시작이 긴밀히 맞닿아 있음을 일깨워 준다. 끝과 시작은 동시성을 지니며, 비워짐과 채워짐, 상실과 탄생 또한 동시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삶이란 결국 끝없이 이어지는 퍼퓨전의 총합이자, '순환'이었다.
때로는 예기치 못한 삶의 한 장면이, 그 이후의 삶을 조용히 이끌기도 한다. 우연찮게 다녀온 학생 시절의 장기 적출이 이식외과 의사의 삶으로 이어졌고, 수술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있다. 앞으로 여러 번의 적출 수술과 퍼퓨전을 마주하겠지만, 언젠가 내게도 또 다른 형태의 퍼퓨전이 찾아올지 모른다. 그럴 때마다 비워야 채울 수 있는 퍼퓨전처럼, 비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보다 의연하게, 삶의 순환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