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쓰는 전공의 Jan 08. 2022

Lily와의 마지막 전화 영어 수업.

인턴, 레지던트 1년 차를 같이했던 Lily 와의 마지막 수업.

전화 영어를 시작한 지도 벌써 4년이 지났다. 처음 3년간은 평일 매일 20분씩, 레지던트가 된 이후엔 10분씩 전화 영어 시간을 가졌다. Lily는 나의 세 번째 선생님이다. 2년간 수업을 같이했다.


인턴 때는 근무 스케줄이 한 달마다 변경되었다. 내과의 경우 데이와 나이트로 나뉘어서 12시간씩 근무를 했었고, 외상 외과는 3일에 한 번씩 당직을 서며 근무를 했었다. 파트마다 일정하지 않은 스케줄 덕에 전화 영어 시간인 저녁 8시 반은 집에 있기도, 병원에 있기도, 아니면 퇴근길이기도 했다. 퇴근길이나 집이면 20분 동안 온전히 통화가 가능했다. 하지만 병원에서의 20분은 온전할 수가 없었다. 전화 영어를 하고 있으면 항상 콜폰으로 병동 콜이 오곤 했다. 한창 영어에 심취해 통화를 하고 있는 와중에 오는 병동 콜에 언어가 헷갈려 '헬로?'라고 전화를 받은 적도 있었다. 순간 간호사 선생님도 당황하고, 나도 당황하고,,,



시끄러운 지하철 안에서 통화를 하기도 하고, 당직을 서며 몰래 통화하기도 했다. 전화 영어를 하는 장소는 주로 병동 구석이었다. 운이 좋으면 빈 회의실이나, 빈 1인실 병실에서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약속이 있는 날엔, 1:1 약속이 아닌 이상 잠깐 나가서 5분이라도 통화를 하고 오기도 했다. 힘든 날엔 첫 목소리부터 짜증이 묻어 나왔었다. 그런 날에는 영어도 잘 나오지 않아 단답형으로 대답하기 일쑤였다.


하루 중 영어를 쓰는 시간이 있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었던 터라, 예습은 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고 오는 피드백 문자를 복습 삼아 가끔 보곤 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나는 Lily 가 지금까지 수업하면서 교재를 사용하지 않는 유일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처음엔 수업하기가 너무 버거웠다고 했다.


하지만 교재를 사용하지 않은 덕에 우리는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영어라는 주제로 대화가 시작되었지만, 그 대화는 언어, 운동, 독서 등 서로의 관심사로 뻗어 나갔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과 친구, 연애 등의 개인사들을 공유했다. 어쩌면 가족보다 더 많은 얘기를 공유한 사이일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매일 일정한 시간에 통화하는 대상이 우리 주변에 또 있을까.


피곤하면 짜증을 내던 나와 다르게 릴리는 항상 긍정적이고 에너지가 넘쳤다. 덕분에 짧은 통화가 끝나면 부정적인 생각도 다시금 고쳐먹곤 했다. 무슨 고민을 털어놓더라도 항상 귀 기울여주고 내 편에서 얘기를 해주던 릴리 덕에 위로를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시작한 전화영어 10분이었지만, 지나고 보니 Lily에게 배운 건 삶에 대한 태도였다. 2년이란 시간 동안 누적된 사소한 대화들이 나를 변화시켰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되었고, 어디서든 잘 해낼 거란 에너지를 가지게 되었다.


사정상 휴직을 하는 Lily 가 너무 아쉽지만, 또 새로운 선생님과의 수업은 또 어떨지 기대가 되기도 한다. 이별은 항상 슬프지만, 덕분에 지난 2년을 반추해볼 수 있었던 저녁시간이었다.

Hi Lily.

I'm not sure this post can reach you though, I wanna say thank you sincerely for your effort.

I appreciate every single class we've been together over last 2 years. I wish you all the best in your future and let's live everyday to the fullest. Stay healthy and safe.

- Nate

매거진의 이전글 돈은 아껴야 할 대상일까? in 리얼리티 트랜서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